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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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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철원 민통선의 쌀 이야기

  • Date.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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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서준원_도시 공간 연구자, 서울대학교 도시경관기획연구실 책임연구원
  • 프로젝트 연구팀  서울대학교 도시경관기획연구실
  • 전시 사진  박상운
  • 기록 사진  철원군청_옛 철원사진
  • 일러스트  프론트 도어

쌀로 이어온 철원의 농민들 삶의 이야기
출입 통제선의 경계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하고 (재)광주비엔날레가 협력하여 서울대학교 도시경관기획연구실에서 진행한 연구프로젝트로 문화역서울 284에서 [DMZ]전시의 한 부분으로서 [DMZ쌀, 철원농민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서 2019년 3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진행되었던 내용의 일부를 본지에 소개하는 것이다.
– 편집자 註

철원평야는 비옥했다.
예나 지금이나 척박하고 가난한 철원에서 늘 변함없는 비옥함으로 쌀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조건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곳이었다.
철원평야는 예로부터 쌀농사에 최적화된 천혜의 땅이었다. 일제 강점기 구철원 시가지가 고향이었던 정연리 임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기억 속 구철원은 황금빛 벼가 일렁이던 평야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에 우리가 없이 살았어도 어느 집이나 늘 쌀밥을 원 없이 먹었지.” 가난해서 생활은 궁핍해도 비옥하고 너른 평야에서 나는 쌀로 지은 밥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는 생활환경이었다.

 

전쟁을 거치며 지뢰밭으로 변한 평야는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철원은, 국가에서 마을 조성을 위해 전국에서 주민들을 모집하면서 민북 마을(민간인통제선 북측 마을)이 생성되었다.
전국에서 이주해 온 입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철원에 가면 ‘내 땅’에서 ‘쌀밥’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따라 온 가족이 이주해 왔다.
 

“우리 마을은 팔도 촌이야. 전국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일손 부족할 때 품앗이해 주면서 한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았지.” 경상북도가 고향인 김 할아버지는 정연리에 정착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서로 도우며 끈끈한 정을 주고받으며 살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라 이야기하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DMZ 인근의 철원 민북 마을은 민간인 통제선 안과 밖에 생성된 마을을 지칭하며, 민통선은 정치적 배경에 따라 시대적으로 그 위치가 계속 변화해 왔다.

DMZ 평화지역의 소외된 땅,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갈 수 없었던 출입통제선의 경계에도 삶은 이어져왔다.

 

정치적∙군사적으로 민감한 최전방 지역에서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군과 국가의 강력한 통제는 생활환경의 모든 분야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주민들의 삶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동안 거시적 역사 속에서 주로 다루어 오던 민통선 인근 마을주민들의 삶을 “쌀”을 중심으로 미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북 마을은 구철원에 살던 원주민과 전국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 재향군인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함께 삶의 터전을 가꾸어 온 마을이다.

한때 철원군 내 14개였던 민통선 마을 수는 2019년 현재 단 3곳으로 줄 정도로 민통선의 기준은 정치적 군사적 상황 속에서 변화해 왔다.
그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비옥한 철원평야를 끼고 있는 민북 마을 사람들은 지뢰밭으로 변했던 평야를 되살려 내기 위해 땅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한 적 없다.
 

남과 북의 70년 가까운 분단 상황 속에서도 최전선의 땅에 사람의 손길이 닿게 하고, 척박했던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나 땅이 다시 비옥하게 되살아 날 수 있게 삶의 온기를 불어넣는 일을 묵묵하게 이어오고 있었다. 

재향군인들이 모여 만든 대마리에 사는 88세 심 할아버지는 네 식구 먹여 살리겠다고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뢰, 탄피 주워 생계 잇고 땅 개간하다가 지뢰 밟아 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지” 쌀농사를 지을 땅을 개간하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지뢰밭을 다듬어 나갔다.
땅 개간 초기에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북한에서 막아 버려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더 컸다.
 

철원 주민들은 땅 개간 와중에도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합쳐 현무암을 들고 날라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끄떡없는 규모의 저수지를 여러 개 만들었다.

“사방이 현무암이어서 농민들이 직접 돌 깨고 지고 날라서 지금의 저수지를 지었어” 양지리 김 할아버지는 매일 밤 군인들에게 점호를 받을 정도로 자유가 제한되는 삶 속에서도 가족과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쌀농사를 위해 부지런히 살아냈다.

“무서웠어. 정치적으로 무슨 사건이 생기면 밤낮없이 이북에서 시끄럽게 방송 틀고 군은 피난 갈 짐 싸라고 난리였지.” 20대 초반에 충청도에서 결혼한 이 할머니는 남편을 따라 대마2리에 이주해와 지금까지 살면서 가슴 졸이며 산 기억을 말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철원평야의 비옥한 땅과 한탄강의 힘찬 물줄기를 품은 곳은 그렇게 다시 한반도의 중심지로 다시 번성할 그 날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사람들의 삶은 쌀과 함께 계속 이어진다.
 

“험한 꼴을 많이 당하긴 했어도 쌀농사 지어서 밥 먹고 살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어. 나는 여기가 내 뼈를 묻을 고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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