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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
118호
Tour
철원 70년을 말하다
VIEW.10244
서준원_도시공간연구자
일러스트 공간잇기
사진 박상운


철원은 신도시가 필요했다. 일제강점기까지 번성했던 철원 구시가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마을과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민간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던 1945년 무렵의 공산치하에서, 1953년 휴전협정 체결로 대한민국으로 편입될 때까지 철원의 구시가지는 한국전쟁의 치열한 전투장이 되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구철원은 폐허가 되었고, 철원과 철원 사람들을 되살려낼 새로운 철원이 필요했다. 철원의 신도시 신철원(新鐵原)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여기 이 태권도장 건물이 있는 터는 뜨거운 물이 철철 나오는 곳이에요. 이 태권도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철원 최초의 대중목욕탕이 있던 곳이지요.”

 


신철원시장 인근 지역에서 1970년대 고려 한무태권도장(한무관)을 운영하는 사범이었던 이근회 할아버지(82세)는 자신이 운영했던 도장 터를 바라보며 말을 한다. 1950, 60년대 당시 우물이나 용화천에서 물을 길어 고무대야 목욕을 해야 했던 문화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물이 솟아나는 우물터와 샘물 터를 따라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마을과 길, 시장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 땅인 구철원에서 신철원으로 이주해 온 이주민이다.

철원군의 가장 남쪽 ‘칡뿌리의 끝’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질 만큼 척박했던 철원군 갈말읍 일대는 비옥했던 구철원 시가지와는 반대로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척박했던 곳이다. 한반도 전쟁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주민으로서의 삶은 신철원의 척박했던 땅을 일구어 나가면서 이어졌다. 신철원은 1954년 철원군청을 이전해 건물을 새로 짓고, 주요 관공서와 학교 등의 공공건물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철원군민들과 실향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함께 정착할 수 있는 마을을 함께 만들어 나갔다. 당시의 신도시 신철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장마을’은 신철원의 시작점이었다. 척박했던 뽕나무 언덕배기에 철원군 행정의 중심인 철원군청이 자리 잡은 것을 시작으로 철원경찰서, 철원지방법원과 철원군보건소, 철원교육청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신철원시장이 들어선 ‘시장마을’ 일대는 서쪽의 신철원 버스터미널부터 우체국과 철원군청을 지나 철원등기소까지 동쪽으로 이어지는 신철원 메인 도로를 중심으로 한 신철원의 중심지역이다. 1950년대부터 터미널과 시장을 중심으로 의원, 사진관, 다방, 여관, 식당 등의 각종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신철원 최고의 번화가이기도 하다.

신철원 버스터미널은 갈말읍에 있기 때문에 갈말 터미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0년에 신축된 현재의 4층 건물은 1970년대 천막 터미널로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터미널 건물의 지하와 2층에 다방과 여관 등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기도 했다. 개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다방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다방은 ‘은파다방’이었다. 그곳은 지역의 정치인과 고위급 군장교, 부농 등이 드나들던 당시 최고위층들의 핫 플레이스였다. 동네 사람들의 아지트로 ‘청자다방’이 가장 유명했다.


터미널 바로 옆에는 식당과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를 이어 운영해 오는 역사가 있는 ‘성광사’가 있다. 1966년에 시작하여 54년째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2대째 연중무휴로 운영 중인 이곳은 신철원의 역사와 함께 한다. 아버지 세대 때는 전파사로 2층과 3층은 아이들 공부방으로 운영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지역주민들의 필수품 등으로 품목을 계속 발굴해 나갔다. 현재는 군인용품도 판매를 하고 있어 신철원터미널을 통해 드나드는 군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시장마을의 핵심인 신철원시장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가장 번성했었다. 번성기를 대표하는 상점들이 여럿 있었는데, ‘개풍상회’는 개풍에서 온 실향민이 운영하던 동네 정육점이었고, 현재의 신철원시장 주차장 옆 은행 자리에 있던 ‘경북상회’도 주류와 잡화를 팔아 동네 아저씨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이처럼 본인이 떠나온 고향의 이름을 딴 상점 이름뿐 아니라 자녀들의 이름을 딴 상점들도 인기였다. 채소나 식료품을 팔던 ‘환준상회’와 옷이나 한복을 팔던 ‘영신상회’ 등이 그러했다. 시장 맞은편 골목의 현재의 ‘태봉청과’ 자리는 나무꾼과 연탄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연탄이 도입되기 전인 1960년대 이전에는 집집마다 온돌을 지필 수 있는 난방재가 싸리나무였다. 나무꾼들이 인근 산에서 싸리나무를 지게에 베어 와서 이 자리에 펼쳐 놓고 팔았고, 리어카로 배달을 해주기도 했다. 시대의 변화에 밀려 나무꾼이 점점 사라지고 연탄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 ‘삼천리 연탄’ 가게가 생겨 한동안 연탄으로 신철원의 혹독한 안방을 따뜻하게 데우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신철원의 3대 중국집 중 하나였던 ‘한생반점’은 아직까지도 대를 이어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중국집이다. 중국의 산동지방 출신 의사였던 1대 사장님 부부가 신철원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1946년부터 1986년까지 약 40년간 운영한 지역의 명물이었다. 이곳의 자장면은 학생들이 졸업 시즌이면 온 가족과 함께 기념 식사를 의례적으로 하던 곳이라 추억이 많이 깃든 곳이다. 이후 이 자리는 미용실, 한정식, 호프집 등으로 바뀌기를 거듭하다가 부부의 아들이 가업을 이어가려는 뜻을 품고 2014년 재 개점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생반점’ 내부에는 1960년대 ‘한생반점’의 모습 사진이 걸려 있는데, 지금과 똑같은 위치에 전봇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은 가게가 여럿 눈에 띄는데 그중의 하나가 ‘희망사진관’이다. 1970년대부터 아버지가 하시던 사진관을 아들이 이어받았다. 같은 장소, 같은 건물에서 운영하고 있는 신철원의 변화하는 모습들을 지켜봐 온 이 지역의 유일한 오랜 사진관이기도 하다. 신철원 버스터미널 길 건너 편의점 자리에 있던 ‘등대사진관’은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식을 대신하여 기념사진을 찍곤 하던 곳이었다.



사진관 쇼윈도에 항상 걸려있던 그들의 사진이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곤 했지만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결혼사진을 찍으려는 신랑들의 헤어스타일을 담당하던 이발관도 여러 곳 있었는데, ‘청춘 이발관’, ‘현대 이발관’, ‘문화 이발관’, ‘현이용원’이 신철원의 대표적 헤어 트렌드 중심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곳이 없지만 ‘현이용원’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8년부터 현재까지 이름과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 중이다. 처음 생겼을 때 새신랑이었을 신철원 어르신들의 헤어스타일을 60년째 담당하고 있는 정겨운 이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