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설이 부는 선자령
‘한반도에서 강원도가 없었다면?’
가끔 설악산에서 야영할 때 한 번쯤 던져본 말이다.
국토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이야 없겠지만, 우리네 같은 산지기들이 간혹 자연의 냉엄함이나 장엄함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들이야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선자령 능선도 바로 그런 지점이다.
영동, 영서를 넘나드는 대표적 고갯마루인 대관령에서 북쪽 6㎞ 지점 선자령까지 뻗은 백두대간의 원줄기를 이루는 능선으로 절경 관광지로 알고 있지만 사실 순식간에 돌변해 목숨도 앗아가는 자연의 매서운 두 얼굴을 가진 곳이다.
동쪽은 급경사 비탈로 강릉 방면의 동해안 풍광이 발아래로 광활하게 전개되며, 서쪽은 대관령 목장, 한일 목장의 목초지가 마치 평야처럼 펼쳐져 있고, 풍력 발전기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사계절 구분 없는 목가적인 아름다움과 완만한 경사는 늘 큰 무리 없이 산행할 수 있어 등산객과 관광객을 부른다. 바람 없는 봄날이나 가을날이 보여주는 평화로움, 눈 쌓인 설경 또한 사람들을 매혹한다.
하지만 한 겨울, 어느 순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상황은 급변한다.
해발 1,100M의 능선은 마의 능선으로 돌변한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고개를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점퍼 옷깃에 얼굴을 파묻고서야 겨우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체중 70kg의 건장한 이들도 바람에 몇 미터씩 옆으로 밀려날 정도입니다.”
지난 12월 1일, 선자령을 찾은 강릉 바우길 이기호 사무국장이 알려주는 겨울철 선자령의 모습이다. 국립등산학교 안중국 교장, 강원도 소방본부 대원들, 몇몇 산악인들은 선자령의 두 얼굴을 알리기 위해 뜻을 모았고, 이날 이 능선에서 동영상을 촬영했다. 각자의 경험과 상황을 공유하며 재연하고, 조난 발생 현황을 공개하고, 조난을 대비한 준수 규칙과 지침들을 조언했다.
강원도소방본부에 의하면 선자령에서 추위와 강풍으로 탈진하거나 동상에 걸려서, 혹은 실족 부상으로 구조 요청을 하는 사고가 빈발한다.
2015년~16년 겨울엔 6건, 2016년~17년 겨울은 6건, 17년~18년에는 무려 10건의 조난 신고가 이어졌다. 실제로 구조 요청까지 이어지지 않은 조난 직전의 상황도 숱하다.
최악의 사고가 일어났던 순간도 공개됐다.
2013년 1월, 바로 그렇게 돌변한 선자령에서 부부의 목숨을 앗아간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이들은 산악회원 36명과 정오경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당시 선자령은 평온했고 정상 부근은 기온이 영하 3~4도에 불과했다. 부부는 파카를 버스에 벗어두고, 등산화에 눈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해주는 장비인 스패츠도 착용하지 않았다. 옛 대관령휴게소를 출발한 지 2시간쯤 지난 오후 1시 30분경 선자령 정상 일대에서 북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먼저 선자령에 올랐던 회원들은 하산하면서 만난 부부에게 하산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들은 강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강한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면서 순식간에 정신이 혼미해졌을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난 뒤, 아내가 먼저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구조되었지만 끝내 사망했다. 초속 20m가 넘는 폭풍설이 밤새 몰아쳤고 남편은 다음날 선자령 정상 아래 약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안 교장(국립등산학교)의 설명도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선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산행 시작 후 날씨가 급변해 상황이 위험해졌을 때 중간에서 어떻게든 되돌아서게 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행 예정지 주변 대피로 정보도 미리 수집해야 하고, 저체온증 환자 발생 때 대처할 준비도 갖추어야 합니다.”
국립등산학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필요한 장비들을 소개하고 설치 방법, 상황 대처법을 하나하나 영상에 담았다.
특히 셸터라 부르며 비상시 뒤집어쓰는 생존 천막 사용을 영상에 담았다. 폴대 없는 홑겹의 천막이지만 그냥 바람에 노출된 상태에 비하면 대단한 보온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장비는 선자령 뿐만 아니라 겨울철 고산은 어디든 꼭 챙겨야 하는 비상 생존 장비라 할 수 있다.
또한 바람이 조금이나마 약해지는 잘록한 곳이나 숲속의 가능한 한 평평한 곳을 찾아 설치해야 온기를 덜 빼앗기고 자리도 좀 더 편해서 오래 견딜 수 있는 팁 또한 자세히 설명했다.
국립등산학교는 이번 교육 영상 제작을 통하여 올바른 등산은 육체와 정신 모두에 유익하지만, 잘못된 등산은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에 셸터를 이용한 비상시 대처법, 밤에도 등산로 잃지 않기 등의 요령을 가르쳐주는 등산 강좌를 개설, 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