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투박하지만
사계절 뚜렷한 팔색조 매력
치악산 둘레길 139.2㎞
주말 내내 무섭게 내리치던 폭우가 끝난 다음 날, 7월 5일.
전문 산악인이 아닌 필자에게 치악산은 몹시 힘들고 거칠다는 느낌으로 남아있던 차에 3년에 걸쳐 조성된 둘레길이 완성되었다기에 본지에 게재할 요량으로 탐방에 나섰다. 원주시가 걷기 여행팀까지 만들어가며 숙려에 숙려를 거듭해 11개 코스를 개발했다고 하니 치악산이 명산은 명산이지 싶었다. 이왕이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알려달라고 문의를 했더니 세 번째 수레너미 길을 추천했다.
원주시 소초면 치악산국립공원 사무소를 관통해 펜션 단지를 지나 구룡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갈라진다. 길도우미 앱에서 치악산 둘레길로 검색하면 코스별로 안내가 되는 걸 보니 참 잘 만들었다 싶다. 사랑별 펜션까지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이 예쁘다. 3코스는 국립공원에 포함된 구역이라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구간이다. 차를 세우고 걸으면 2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깊은 숲속이다. 청량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아서 시원하고 안온함을 느끼게 한다.
“치악산이 오랜만이시지요?” “예, 잘 오지는 않았네요. 그런데 근래 들어 와본 산중에 제일 편안하고 아름다운데요?” 오랜만에 같이 취재에 동행한 주 민욱 작가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금방 잣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참 의외다.
치악산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이 동해로 달아나며 가파른 계곡들을 만들어 깊게 팼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산세가 뛰어나면서도 험난한 것으로 이름이 높은 산인데 이런 산책 같은 길이라니. 우스갯소리로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의미로 ‘치악’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인데 이렇게 완만한 능선의 도보 코스를 찾아내다니.
영월군 수주면과 경계에 있는 치악산은 워낙 오래된 사찰이 많아 부도 탑과 기원을 위한 석탑의 사진들이 한동안 각종 사진 공모제에 꽤 빈번하게 출품되기도 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강원유형문화재 24호인 보광루를 보유한 구룡사와 금강소나무길, 벌목 금지의 상징인 황장금표, 한국 전래 동화에 등장하는, 구렁이에게 잡아 먹힐 뻔한 꿩을 구해준 선비와 생명을 바쳐 은혜를 갚은 꿩의 보은 설화를 간직한 상원사의 벽화와 범종 외에도 국형사, 보문사, 입석사가 있다.
또 전쟁 유적지인 영원산성과 해미산성 터, 우리나라의 대표적 온대림으로 천연기념물 93호인 성황림도 온전히 품고 있다.
수레너미 길에는 치악산의 깊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수백 년 된 장송과 각종 활엽수림이 가득하다. 1971년부터 조림한, 수령이 50년이나 되는 잣나무 1,000그루가 반기는 숲속 놀이터에서 잠시 쉬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시설도 있으니 가족이 산책하기에도 안성맞춤. 그래서인지 취재 당일에도 마을에서 운동 삼아 올라온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계곡을 따라 다시 수레너미재로 향한다.
비 온 뒤 맑게 갠 날이어서인지 물줄기가 마치 작은 폭포처럼 제법 거세고 그 사이로 이슬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이끼들과 나뭇잎들도 곱기만 한데 삽상하기까지 하다. 고사리와 석송도 지천으로 보인다. 2만 종이 분포한다 하니 양치식물 구역이라 불릴만하다. 단풍나무를 셀 수도 없어 가을에 얼마나 멋있을지 연상이 되어 ‘꼭 다시 와야겠구나!’하고 맘을 먹었다.
학곡리 한다리골에서 횡성군 강림까지 연결해 주었던 옛길이라는 수레너미재.
치악산 능선의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의 고개에 다다르면 다녀갔다는 인증을 위한 스탬프 투어 박스가 등산객들을 반긴다.
운곡 원천석 선생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거부하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에 은거하자, 조선 태종 이방원이 스승인 그를 만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수첩 대신 손바닥에 도장을 슬쩍 찍었다.
이방원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주필대’라고 불렀다가 후일 바뀌어 불린 ‘태종대’까지 걸으면 이 코스가 끝난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길이자 생태와 역사,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문화 순례길. 원주 104.5㎞, 횡성 12.3㎞, 영월 22.4㎞로 강원도 3개 시군을 포함해 조성된 이 둘레길은 총 139.2㎞. 원주시는 7천1백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치악산 구석구석을 찾아가며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서로 어우러지도록 연결하였다고 한다.
길을 걸으면서 심신을 치유하고, 나를 찾으며, 곳곳마다 소박한 삶의 체취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걷기 편한 흙길, 숲길, 물길, 마을 안 길로 이어져 최대한 많이 걸을 수 있도록 코스를 선정했다더니 걸어보니 그들의 노력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해 팔색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치악산 둘레길.
11코스를 완주하면 가을과 겨울까지 오롯하게 즐길 수 있을 터이다.
TIP 치악산 둘레길 코스 문의 : www.chiaktrail.kr. ☎ 033-762-2080
● 1코스 꽃밭머리 길. 국형사▸원주 얼광장 ▸상초구주차장(제일 참숯). 11.2㎞. 3~4시간
● 2코스 구룡 길. 상초구주차장(제일 참숯)▸새재 ▸ 치악산 국립공원 사무소. 7㎞. 2~3시간
● 3코스 수레너미 길. 치악산 국립공원 사무소 ▸수레너미재 ▸ 태종대. 14.9㎞. 4~5시간
● 4코스 노구소 길. 태종대 ▸말치재 정상 ▸두산 임도 ▸초치. 26.5㎞. 7~8시간
● 5코스 서마니 강변 길. 중골 정상 ▸서마니 강변 ▸황둔 하나로 마트. 10.4㎞. 3~4시간
● 6코스 매봉산 자락 길. 황둔 하나로 마트 ▸황둔MTB임도 ▸석기동. 14.3㎞. 4~5시간
● 7코스 싸리치 옛 길. 석기동 ▸신림 공원 ▸용소막 성당. 9.8㎞. 3시간
● 8코스 거북 바우 길. 용소막 성당 ▸구학산 주차장 ▸석동 종점. 11.4㎞. 3~4시간
● 9코스 자작나무 길. 석동 종점 ▸치악산 자연 휴양림 ▸금대 삼거리. 15㎞. 4~5시간
● 10코스 아흔아홉 길. 금대 삼거리 ▸뒷들 이골 ▸당둔지 주차장. 9.3㎞. 3시간
● 11코스 한가터 길. 당둔지 주차장 ▸한가터 ▸국형사. 9.4㎞. 3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