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사찰 손끝에서 꽃피운 불도,무형유산이 되다
동해 삼화사 지화장엄
牧丹花王含妙香(모란화왕함묘유)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 묘한 향 머금었고
炸藥金蘂體芬芳(작약금예체분방) 작약의 금색 꽃술과 대에는 향기가 분분하네
妙菡紅蓮同染凈(묘함홍련동염정) 홍련의 꽃봉오리 깨달음과 번뇌가 다르지 않고
更生黃菊霜後新(갱생황국상후신) 다시 핀 노란 국화는 서리 뒤에 새로워라
- 천지명양 수륙재의 범음산보집 天地冥陽 水陸齋儀 梵音刪補集, 영산작법 절차 중 할화(喝花) -
지난 4월 11일, 동해 삼화사의 독특한 불교 의례 문화인 ‘지화장엄’이
강원특별 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새롭게 지정됐다.
사계절 내내 불단에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부처님께 올리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온
삼화사 지화장엄은 특히 신도 중심의 특별한 전승 방식으로 불교 문화유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교 의례 필수 지화, 수행과 예술의 결정체
꽃은 불교 의례와 관련이 깊다. 가장 대표적인 영혼 천도의례인 영산재(靈山齋),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넋을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 살아서 미리 자신의 재를 지내는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등 의례에 마련되는 설단은 어김없이 갖가지 꽃으로 장식된다. 사십구재의 회향날 사용하는 반야용선(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간다는 배)과 영가단(죽은 사람이 타는 가마를 올려놓는 단상) 역시 으레 색색의 꽃으로 장엄된다. 육법공양(六法供養)에는 꽃을 피우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고 해서 수행을 뜻하는 만행화(萬行花) 꽃공양도 있다. 불전에 올리거나, 각종 행사 헌화용으로, 심지어 착복무까지 꽃은 다양하게 쓰인다.
이 모든 의례에 사용되는 꽃을 불교지화(紙花)라 부르고, 불단을 꾸미는 일련의 과정 장엄문화까지 담아 지화장엄(紙花莊嚴)이라 일컫는다. 과거 생화가 귀했던 현실적인 이유와 더불어, 계절과 관계없이 원하는 꽃을 피워 공양하고 싶었던 선조들의 바람, 의례의 규모와 성격에 맞춰 자유롭게 장식하고 싶었던 지혜, 불교 계율을 지키면서도 아름다운 꽃으로 신심을 표현하려 했던 간절함이 지화에 오롯이 담겨 있다.
불교에선 꽃에 신성성을 부여해 의식에 바쳐진 지화들을 의례가 끝난 뒤 태워,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에 인간의 염원을 담아 극락에 전달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오늘날 지화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오직 구전과 실기 중심의 기법 전승에만 의존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로 인해 전승 범위가 좁고 특정 사찰 중심으로만 이어지는 한계가 있다. 의례와 연계되어 활용되며 제작에 막대한 시간과 공력이 소요되는 특성도 지화 전승의 어려움을 가중한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 맥 이어오며 지화 전통 계승
지난 5월, 비 온 뒤 맑게 갠 두타산의 삼화사(三和寺). 고즈넉한 산사는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두고 맑은 무릉계곡 물소리처럼 졸졸 분주한 활기로 가득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품은 특별한 문화 유산 지화장엄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삼화사는 불교에서 가장 공덕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는 수륙재를 매년 10월, 3일에 걸쳐 연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국가 주도로 설행된 ‘국행수륙대재’의 맥을 이어온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여러 차례 단절 위기 속에서도 굳건히 전승돼 2013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삼화사 수륙재가 펼쳐지는 동안 두타산을 배경으로 웅장한 괘불 아래 마련된 설단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화로 꾸며진다. 각종 공양물과 함께 단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종이꽃들.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성현과 범부의 환희로운 만남을 축복하는 듯 활짝 꽃 피우며 장엄함을 더한다.
신도 중심으로 전승 인정받아 도 무형유산 지정
천년고찰 삼화사에 지극한 정성으로 피어나는 지화장엄이 마침내 강원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지정 됐다. 장식의 목적을 넘어 한 장의 종이에 담긴 불자의 간절한 염원과 땀방울이 예술이자 수행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승려의 가르침과 신도 중심으로 이어진 독특한 전승 방식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화사 적광전 서쪽 수륙재 건물. 넓은 홀과 여러 방으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스무명 남짓 삼화사 지화장엄보존회 회원들이 꽃잎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 넣는데 여념이 없다. 삼화사 수륙재보존회 산하에 별도로 조직된 지화장엄보존회가 불교지화를 전승하고있는 현장이다.
“신자 주축의 지화 제작반을 두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과 제작 활동을 이어갑니다.” 연중 매주 주말마다 수륙재 건물은 지화 전승 학교이자 작은 공방으로 변한다. “신도들이 모여 의례와 사찰 행사에 필요한 지화를 만듭니다. 주말 전수 교육 외에도 연 2~3회 체험 부스를 운영해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삼화사 지화를 알리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지화장엄의 전승과 보전, 확산 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삼화사수륙재보존회 이상춘 이사의 목소리에 사뭇 진한 자부심과 단단한 의지가 느껴진다.
한 송이 종이꽃에 담긴 수행과 정성
지화 제작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천연 한지를 자연 염색하고 꽃잎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만들어 내는 지난한 과정이다. 재료 준비부터 시작해 재단하고, 염색하고, 꽃잎에 주름을 잡고(살잡기), 꽃을 피우고(작봉하기),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꽂아내는(난등치기) 작업까지. 수많은 절차와 막대한 공력을 들여야 비로소 한 송이 종이꽃이 완성된다.
지화장엄보존회 지영애 팀장이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연꽃 지화 한 송이를 조심스레 들어 보였다. “보존회 회원들이 직접 홍화, 치차 같은 염색 식물을 재배해서 천연 염색해요. 모든 과정을 손수 다 하죠.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정성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이 과정 자체가 저희에겐 하나의 수행이에 요. 정성과 희생 없이는 할 수 없어요.” 회원 14인과 함께 삼화사 지화장엄을 전수한 지 팀장. 그의 말속에 지화장엄을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했다.
삼화사에서 사용되는 불교지화는 모란, 작약, 홍련, 국화, 전설의 꽃 우담바라까지 약 일곱 가지. 의례의 성격과 불단의 상단, 중단, 하단, 영가단 등 배치되는 위치에 따라 지화의 종류와 의미가 달라진다. 상단에는 오색으로 고루 물들인 모란으로 대형 부채난등, 고임새 장식, 병화 등 세 종류 의 장엄을 올린다. 중단에는 팽이난등으로 꾸민 작약이, 하단에는 홍화색 연꽃, 부들, 연잎 수백 송 이가 오른다. 지화는 일 년 내내 재료를 준비하고 수 달 동안 정성을 들여 제작해야 비로소 야단 법석(불교의 큰 의례)에 올려진다. 그렇게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지화는 의례의 격식을 높이고 영가에 올리는 가장 지극한 공양물이 된다.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말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교의 깊은 뜻을 전하는 지화.
넋을 위로하고 부처님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송이송이 정성스레 피워내는 지화장엄.
오늘도 동해 두타산 자락에선 신도들의 손끝에서 피워 올린 지극한 불도가 아름답게 꽃 피우고 있다.
Tip. 삼화사. 동해시 삼화로 584. www.samhwasa.or.kr. 033 - 534- 7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