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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4
Travel
시공의 물결이 머무는 땅, 영월이 건넨 말랑한 위로
글ㆍ사진 : 양창범(강원 영월군)



독자 기고



강원도의 산맥을 넘는 일은 때로 내면의 옹이를 마주하는 일과 닮아있다. 

굽이진 길을 돌 때마다 나타나는 비경은 찬란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의 상흔은 묵직하다. 나는 이곳 영월 주천에서 과자를 빚으며 산다. 딱딱한 곡물가루를 달콤한 조청으로 버무려 말랑한 온기를 만드는 일이 내 생업이라면, 영월의 척박한 역사와 전설을 시적인 언어로 버무려 여행자의 마음에 건네는 일은 내 숙명이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영월의 속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 무릉도원에서 만난 숲속의 우주, '인디문학 1호점'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무릉도원면(옛 수주면)에 들어서면 공기부터가 말랑한 온기를 품고 있다. 이곳 산 중턱, 초록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인디문학 1호점’은 영월 최초의 문학 전문 독립서점이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숲속에 서점이 생기자, 신기하게도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점지기 윤태원 씨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놓아두기 위해 열었다는 이 작은 공간은, 이제 잊어버렸던 꿈을 상상해 보는 청년들의 플랫폼이 되었다. 서울의 대형 서점보다 더 다양한 독립출판물과 문학 서적들이 이곳 숲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팍팍한 도심에서 얻은 마음의 흉터들이 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한 위로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 법흥사의 솔바람, 천년의 고독을 씻어내다

무릉도원면의 깊은 품으로 더 들어가면 사자산 법흥사가 나타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 주차장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숲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곳의 소나무는 조선 시대 왕실에서 단단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던 ‘황장목’의 후손들이다. 숲길에 들어서면 시원한 솔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마애불 뒤편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린 소나무 너머로 주천강의 풍광이 펼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유유자적’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깨닫는다. 법흥사의 솔바람은 단순히 시원한 공기가 아니라, 천년의 고독을 묵묵히 견뎌온 산사가 건네는 낮은 목소리다.

   




# 주천(酒泉)의 술샘과 의로운 호랑이, 그리고 붉은 예술의 변주

내 삶의 터전인 주천면은 ‘술이 샘솟는 곳’이라는 지명답게 풍요로운 전설을 품고 있다. 망산 바위 아래 술샘은 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탁주를, 높은 자에게는 약주를 내주었다는 서글픈 계급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설화를 모티브로 세워진 ‘술샘 박물관’은 이제 ‘영월 Y파크(젊은달와이파크)’라는 이름의 거대한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조각가 최옥영의 예술적 영감이 투영된 붉은색 대형 조형물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낯선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주천에는 또 하나의 뭉클한 자국이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호랑이 무덤인 ‘의호총(義虎塚)’이다. 장마로 불어난 강물 앞에서 어머니의 약을 구하지 못해 울던 효자 금사하를 등에 태워 건네준 호랑이 전설이다. 호랑이는 금사하와 함께 3년 시묘살이를 하고, 숙종의 국상 때도 함께 망배하다가 금사하가 상을 마친 지 3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동물을 넘어선 신의와 효의 기록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잃어버린 ‘뜨거운 오지랖’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 주천의 미식, 시간의 깊이를 우려낸 국수 한 그릇

여행의 허기는 주천의 노포들이 채워준다. 197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오는 ‘제천식당’은 영월 미식의 자존심이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꼴두국수’다. 메밀이 흔하던 시절, 너무 자주 먹어 꼴도 보기 싫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직접 말리고 빻은 메밀면의 그 심심하고 고소한 맛은 외려 사무치게 그립다.


혹은 ‘뜨락칼국수’에서 집된장 베이스의 구수한 장칼국수를 만나보아도 좋다. 영동의 고추장 베이스와 달리 된장의 깊은 풍미가 살아있는 이곳의 국물은 배추가 푹 익어 마치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배추된장국 같은 정겨움을 준다. 얇은 피의 수제 손만두와 갓 버무린 겉절이의 조합은 영월 여행의 ‘간’을 완벽하게 맞추며 오늘의 고단함을 달래준다.


 



# 청령포의 노송이 증언하는 비운의 역사, '왕과 사는 남자'

영월읍으로 발길을 옮기면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기다린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이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은 험준한 암벽으로 막힌 ‘육지 속의 섬’. 16세 어린 왕에게 이곳은 절경인 동시에 지독한 감옥이었다. 단종어소를 향해 허리를 굽힌 ‘엄흥도 소나무’와 단종의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600년 수령의 ‘관음송’ 앞에 서면, 역사는 더 이상 책 속의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통증으로 다가온다. 목숨을 걸고 왕의 마지막을 지킨 엄흥도의 신의는 영화의 감동을 넘어 청령포의 빽빽한 소나무 숲 사이를 흐르는 서늘한 기운으로 남아 있다. 

   



# 영월 관광센터와 '화이통', 꽃차로 피어나는 사회적 온기

청령포 인근의 ‘영월 관광센터’는 폐광 지역의 아픔을 예술로 치유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층 미디어 전시관에서는 민화 속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3D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감상할 수 있다. 이곳 3층 야외 테라스에 앉으면 청령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바삭한 감자튀김과 차 한 잔의 여유는 여행의 긴장을 달래준다. 



특히 이곳 2층의 ‘화이통협동조합’은 꼭 들러야 할 명소다. ‘꽃으로 통한다’는 의미의 화이통은 지역 할머니들이 직접 키운 꽃을 수매하여 꽃차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다. ‘할머니 화첩’이라는 브랜드로 피어난 이 꽃차들은 소외된 어르신들에게 일자리와 자부심을 되찾아준 귀한 결과물이다. 투명한 찻잔 속에서 꽃이 다시 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영월의 척박한 땅이 어떻게 따뜻한 공동체의 온기로 변모했는지를 말해주는 ‘말랑한 위로’다.



   

# 고기의 상향평준화, 영월 삼겹살에 깃든 광부들의 애환

영월 기행의 대미는 삼겹살이 장식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월에서는 어느 식당을 가도 삼겹살의 질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이는 영월의 아픈 역사인 광산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 거친 갱도 안에서 탄가루를 마시며 일해야 했던 광부들에게 돼지고기 기름은 목에 낀 먼지를 씻어내 주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공휴일이면 계곡에서 평평한 돌을 구해 구워 먹던 ‘삼겹살 돌구이’는 광부들이 누리는 최고의 호사였다. 까다로운 광부들의 입맛과 체력을 만족시켜야 했던 식당들은 자연스럽게 최상의 고기를 선별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영월 삼겹살의 상향평준화를 이끌어냈다. 영월의 삼겹살 한 점에는 막장에서 희망을 캐던 이들의 땀방울과 그 고단함을 묵묵히 견뎌낸 가족들의 서사가 고소하게 배어 있다.

   



+ 더하는 글

영월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땅입니다. 주천의 술샘 설화는 공정의 가치를 묻고, 청령포의 노송은 신의의 깊이를 묻습니다. 무릉도원의 작은 서점은 우리 안에 잊힌 꿈의 불씨를 묻지요. 영월 기행은 단순히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600년 전의 왕을 만나고, 50년 전의 광부를 만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인문학적 성찰의 과정입니다.


주천에서 과자를 빚으며 나는 늘 생각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세상을 녹이는 것은 결국 사람의 온기라고 말이지요. 

영월의 흉터 같은 역사들이 지도가 되어 나를 이끌었듯, 

여러분의 삶 속에 깊게 팬 상처들도 영월의 꽃차처럼 향기롭게 피어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영월은 오늘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흐르는 동강의 물결처럼 여러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