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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4
Letters to the Gangwon
휠체어에서 만난 강원의 아침
글ㆍ사진 : 이병길(강원 홍천군)



독자 기고



강원의 새벽은 언제나 조용하다.
밤의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고 산 능선 위로 연한 빛이 번질 때, 세상은 마치 깊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고요해진다. 
나는 매일 아침 그 순간을 기다린다. 홍천의 아파트 14층 창가에서 바라보는 강원의 동틀 무렵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 휠체어 위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지만, 내게 강원의 하늘과 산과 강은 누구보다 넓고 깊다. 어쩌면 두 다리로 걷지 못하기 때문에 더 오래 바라보고 더 깊이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혈우병과 소아마비라는 병을 안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두려웠고, 창밖의 풍경은 늘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삶은 걷는 속도로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휠체어 위에서도 길은 이어지고, 마음은 얼마든지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강원 곳곳을 달리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휠체어를 싣고 길을 나서자 세상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홍천강을 따라 이어진 길을 달리다 보면 강물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강은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흐르며 계절의 이야기를 품고 간다. 그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하는 것 같다. 


“괜찮다. 천천히 가도 된다.” 


춘천의 호수에서 맞이한 아침도 잊을 수 없다. 물 위에 떠오른 안개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세상은 잠시 꿈속처럼 보인다. 그 풍경 앞에 서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온다.





강원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이 있다. 대관령의 바람은 세차게 불지만 그 바람 속에는 묘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면 마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가슴이 시원해진다.


나는 가끔 휠체어를 타고 마을 길을 천천히 지나간다. 논과 밭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일하던 어르신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기부천사 또 왔네!”

그 한마디에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다. 강원의 사람들은 말이 많지 않지만 마음은 참 깊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독거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쌀을 나누고 안부를 묻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어르신들의 거친 손을 잡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먼저 따뜻해진다. 그럴 때 나는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순간, 삶은 가장 빛난다는 것을.



 


강원의 길은 때로 멀고 험하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늘 사람의 온기가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되면 홍천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눈은 세상을 조용히 덮고 모든 풍경을 하얗게 만든다. 나는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도시를 오래 바라본다. 그 고요한 풍경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삶도 이 눈처럼 누군가의 마음 위에 조용히 내려앉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강원은 내게 단순한 고향이 아니다.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 삶의 터전이다. 병으로 힘들던 날에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던 날에도 강원의 산과 강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남은 삶 동안 이 따뜻한 강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동트는 강원’은 지난 30년 동안 강원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온 소중한 창이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눈물, 누군가의 희망이 그 페이지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강원의 진짜 풍경은 산과 강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이야기 속 작은 한 줄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동쪽 하늘에서 햇살이 떠오른다.
강원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휠체어 위에서 바라보는 그 아침은 언제나 눈부시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말한다.

“강원아, 고맙다. 그리고 동트는 강원, 서른 번째 아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26년 3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