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기고
타마구 덮인 아스팔트 위로 마른 먼지 날리는 기억의 내 고향 강원도 원주 학성동 희망촌(希望村).
혹자는 망촌(亡村)이라고도 부르며 없어져야 하는 동네 취급 받기도 했지만 60여 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희망촌(希望村)이라 불리며 윗동네 매화촌(梅花村)과 함께 원주시의 대표적 개발 희망 동네다. 오갈 곳 없는 인생들이 모여 집창촌(集娼村)을 형성했고 밤에는 골목길을 뛰어가던 군인들과 뒤쫓는 헌병들 군화 발소리도 군사도시 이미지의 한 조각이다.
중등 시절 희망촌에서 이사 했지만 여전히 학성동에 살면서 승차비 5원짜리 동신운수 버스로 단구동의 원주중학교에 등하교했던 기억은 아직도 아득하게 그리운 풍경이다. 대학생 때는 서울 유학비가 부담되는 상황에 운 좋게도 동네에 의과 대학이 설립되면서 비록 서울서 유학 온 부잣집 자제들과 환율 차이 이상의 화폐단위로 소통이 어렵기도 했고, 격변의 시대에 휘둘리기도 했지만 무사히 의사가 되어 우물을 탈출하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튀어본다고 했지만 여전히 강원도 여기저기 산골이라 내 인생에서 강원도는 동이 트고 황혼이 지는 우주의 전부다.
대학 졸업 후 의사가 되어 공중보건의 첫 발령지가 평창군 메밀밭 봉평 보건지소.
소가 여물을 먹지 않는다며 마이신을 요구하시는 할머니가 계시던 봉평면에 당시엔 천당만큼 청정한 흥정계곡과 해를 볼 수 없다는 무이리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훈련소에서 입던 국방색 패드를 걸치고 스키를 시작했던 하얀색이 전부였던 용평스키장이 있다. 이후 삼척시로 발령을 받아 당저리에 살며 보건소 근무를 했다.
영서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감나무가 늦여름까지 짙은 녹음을 드리우고 가을에 이르러서는 빨간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던 시골집 자취생활 중 이웃 동네 동해시 고교에 근무하던 선생님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동해시 천곡동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공중보건의를 끝내고 전문의 과정을 위해 모교가 있는 원주로 다시 돌아온 후 전문의가 되었고 바로 춘천시 후평동으로 이사 해서 생활하게 되었다. 춘천에는 유명한 소양강과 의암호로 인해 항상 물과 가까이 지냈던 기억만 가득하다. 삼천동의 윈드서핑장과 중도의 수상 스키장. 운동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았던 내게 춘천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이후 누구나 피하기 힘들다는 인생 곡절을 거치며 오지라 불리는 태백시 장성동의 병원에 취직하게 되어 십 년 태백살이를 하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태백산 첫 등산은 낯설었지만 이후 계절 없이 주말마다 오르내리다 보니 그야말로 눈감고도 오를 수 있는 동네 산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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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살이 할 때 처음으로 ‘동트는 강원’이라는 신박한 잡지를 보게 되었는데 나의 터전인 강원도를 사진까지 곁들여 샅샅이 세밀하게 보여주니 매우 좋아하게 되어 당일로 구독 신청을 해서 꾸준히 보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판수가 늘어갈수록 책의 외형도 내용도 더 단단해지고 유익해지는 듯해서 너무 좋다. 강원도 여러 곳에서 지냈지만 생활인으로 지내는 것은 숨은 곳곳 찾아 즐기기에는 부족함을 느끼는데 ‘동트는 강원‘은 이러한 충족 욕구를 꽉 채워주고도 남는 선물이다.
그렇게 좋아지고 있는 선물이 벌써 반 갑자(甲子)를 지나 30 주년이 된다 하니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작은 팸플릿으로 보였던 첫 만남이 새롭고 소중한 기억이다.
이제 60갑자를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강원도에서 돌고 있는 내게 ’동트는 강원‘은 오래되었지만 만나면 항상 반가운 친구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강원도 곳곳을 저렇게 잘 보여주는 훌륭한 친구를 둔 덕분에 매우 행복하다.
먼 옛날 송강 정철이 어듸메뇨 라고 읊조렸고 내 고향과 이웃하는 섬강의 발원지를 품고 있는 횡성(橫城)에서 근무한 지 수년. 횡성의 숨은 비경들도 차근차근 찾아보며,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같이 하고픈 마음을 담아 '동트는 강원'을 무한히 응원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