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 기고_생활수기
여상을 졸업하고 생산직에 취업을 했다. 밤하늘의 젖은 별을 보며 출근하던 어느 날, 퇴사를 결심했다. 아주 어려운 시험을 보기 위해 두 시간씩 자고 흔하게 밤을 새웠다. 그러면서 많게는 하루 열 번까지도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뇌를 정리해 암기할 공간을 만들어 주고, 필기할 수 있도록 손목에 혈액을 공급해 주었다. 몇 년을 버티던 끝에 결국 쓰라린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 가득했던 책들을 처분하는 날이었다. 냄비 받침대로도 한 번 쓰지 않던 귀한 책들을 전부 내줬는데도 고물상 주인은 공짜로 책장을 버려주는 것으로 책값을 퉁 치겠다고 했다. 의뭉스러운 미소 앞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하늘도 슬픈 듯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온통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산과 터널과 회색 하늘만 반복되던 지루한 풍경을 뚫고 드디어 강릉시외버스 터미널에 발을 디뎠다. 터미널 식당에서 제육정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안목으로 향했다. 지금은 멀어진 친구와 동행했던 카페를 어렵지 않게 찾아 반가웠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겨울 바다를 바라봤다. 세상을 향해 반짝이던 눈이 처음으로 초점 없이 흐릿해졌다. 커피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심지어 같은 메뉴로 리필도 가능했다. 그 한잔에 세상 모든 피곤을 짊어진 듯한 표정이 해사하게 밝아졌다. 공부만 도와주는 줄 알았더니만, 그날의 커피는 잃었던 삶의 생기까지 찾아주었다.
안목해변의 커피거리는 초입의 커피 자판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추억 때문인지 바다 향기와 눈과 마음이 뻥 뚫리는 뷰 때문인지 그 맛이 기가 막히다고 입소문이 났고, 찾는 이가 늘어나자 그 옆으로 카페가 하나둘씩 생기면서 지금의 커피거리가 생겨났다고 한다. 해변의 카페들도 모두 잠든 새벽, 자판기 앞에 선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새벽의 찬 기운을 마시며 길 따라 방파제로 걸어가 그 끝의 빠알간 등대로 향한다. 달콤한 향이 새벽추위를 달래준다. 그런 나를 반기듯 떠오르는 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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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부칠 때면 어김없이 다시 강릉을 찾았다. 동해, 남해 전국 각지의 사찰, 유명한 일출명소들을 가봤지만 안목해변만한 장관은 없다. 청춘을 바친 시험에 실패해도, 첫사랑에 실패해도 가고, 이혼을 고민할 때도 갔다. 비록 큰일은 아닐지라도 일상의 자잘한 공격에 얻어맞다 쓰러지기 직전이 되면, 어김없이 그곳을 찾았다. 처음 안목의 빨간 등대를 알게 된 사연은 이렇다.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성수기라 바다 앞 숙소가 매진되어 터미널 근처에 묵게 되었다. 한 여름 일출시각 5시 14분, 알람을 맞추고 부른 택시 기사님께 다짜고짜 부탁드렸다.
"기사님, 멀리서 왔는데요. 강릉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가주실래요?"
최소 낭만파 기사님이 1초의 고민도 없이 데려다주신 곳이 바로 안목해변이었다
"저어기 멀리 빨간 등대 보이죠? 거기 앞까지 죽 걸어가서 보면 진짜 해가 아주 크게 보여요. 기가 막혀요. 얼마나 사진 찍으러들 많이 오는지 몰라요.“
방파제를 따라 등대로 걸어갔다. 그날따라 주변에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방파제를 지나 걷다보니 어둑했던 주변에 서광이 비쳤다. 일출시각을 넘겨도 보이지 않는 해에 오늘은 글렀나 싶었다. 체념할 즈음, 사방이 훤해지고 손톱만한 해가 삐죽 떠올랐다. 곧이어 거침없이 바다위로 쑤욱 얼굴을 자랑스럽게 내민 해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말갛고 붉고 컸다. 진공상태처럼 한참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일출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 해인지 저 해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물아일체를 경험했다.
일출직전의 캄캄한 하늘이 지금의 내 상황 같고, 깊고 어둑한 바다를 뚫고 떠오르는 해는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다시 태어나는 나, 같았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떠올랐다. 항상 지겨운 나를 벗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후회 가득한 삶에 리셋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에 늘 시달렸다. 그러나 높이 떠올랐다 다시 바다에 잠기는 해처럼 그냥 하루하루 먼 여행을 갔다 돌아온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처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니 해가 제법 높게 떠올랐다. 붉은 기를 간직한 노란 햇살이 바다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바다 위에 길이 난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손 맞잡고 빛나는 길을 눈이 멀 때까지 걷다 해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가슴도 뜨겁게 울렁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삶에서 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카페에서 좋은 이와 커피 한잔, 저녁이 있는 삶, 가끔 훌쩍 바다를 보러 떠날 수 있는 자유.
더는 바라는 게 없었다. 소박한 원을 모르고 거창한 꿈을 품었다.
돌아오는 버스 차창에 기대 잠깐 졸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찰나,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
안목의 커피와 일출은 다시 꿈을 꾸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