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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Letters to the Gangwon
침묵의 공간에서 마주한 찬란한 역사
원주 폐사지 순례
글ㆍ사진 : 이동환 작가



독자기고



세월의 흐름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비바람에 깎인 돌단만이 남은 곳, 우리는 그곳을 폐사지라 부른다. 

정기적으로 국내의 이름 없는 옛 절터들을 찾아 떠나는 '만다라회'의 2026년 1분기 여정은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원주는 한때 신라와 고려를 잇는 불교 문화의 요충지였으며, 지금은 그 찬란했던 기억을 품은 거대한 폐사지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곳이다. 이번 순례에서는 원주가 자랑하는 3대 폐사지인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법천사지를 차례로 돌아보며 잊힌 시간의 궤적을 쫓았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지정면에 위치한 흥법사지였다.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이곳은 지금은 민가와 밭이 절터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가장 먼저 체감하게 한다. 비록 화려한 법당은 사라졌지만, 보물로 지정된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했다. 거북의 등에 새겨진 섬세한 무늬와 용의 기상은 천 년 전 이곳이 결코 작지 않은 위상을 지녔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텅 빈 공간이 주는 고요함 속에 서서, 과거 이곳을 가득 채웠을 독경 소리를 상상해 보는 것으로 순례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부론면으로 이동하여 거돈사지를 마주했다. 거돈사지는 폐사지가 줄 수 있는 미학적 완성도의 정점을 보여준다. 정연하게 쌓아 올린 석축과 그 위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 그리고 뒤편에 자리한 원공국사 승탑까지 이어지는 배치는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특히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절터를 지키고 서 있는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인위적인 복원 없이도 비어 있음의 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연이 어떻게 역사를 품어 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이번 순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법천사지였다. 법천사지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앞서 방문한 두 곳과는 확연히 다른 압도적인 규모로 우리를 맞이했다. 부론면 법천리에 넓게 펼쳐진 절터는 눈이 닿는 곳마다 주춧돌과 석재들이 흩어져 있어, 전성기 시절 이 절이 얼마나 거대한 가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산자락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 부지의 광활함은 당시 법천사가 지녔던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장엄한 자태였다. 오랜 객지 생활과 수난을 견디고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이 탑은 고려 시대 석조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탑 전체에 빈틈없이 새겨진 섬세한 조각들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화려했다. 8각의 면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과 정교한 꽃무늬 장식은 차가운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장인의 혼을 느끼게 했다. 지광국사 해린의 높은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었으며, 법천사라는 거대한 공간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었다.  






법천사지의 광활한 대지를 거닐며 우리는 단순히 무너진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의 흔적을 읽었다. 건물은 무너져 내렸지만, 그들이 돌에 새겨 넣은 신념과 예술적 열정은 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특히 지광국사탑 앞에 서서 느꼈던 경외감은 이번 1분기 순례가 남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법천사의 터와 그 안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지광국사탑의 조화는 우리 '만다라회' 회원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오후의 햇살이 폐사지의 당간지주 위를 따사롭게 비추었다. 화려했던 과거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석탑과 비석들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고 있다. 원주의 폐사지들은 우리에게 비어 있음이 곧 결핍이 아니라, 더 큰 사유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임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순례에서는 또 어떤 침묵의 언어를 마주하게 될지 기대하며, 원주의 찬란했던 봄날을 마음 한편에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