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 개수산 산자락.
겉보기엔 평온한 산촌 같지만, 산의 내밀한 품속에는 4억 년의 시간이 응축된 거대한 암흑의 세계가 펼쳐진다.
서늘한 어둠 속에서 태고의 신비와 생명의 온기를 동시에 품은 곳,
평창 광천선굴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영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려 평창나들목을 빠져나와 정선 방면 31번 국도에 올라타면, 차창 밖으로 가리왕산(약 1,561m)과 금당산(1,173m)의 묵직한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한때 영동과 영서를 잇는 길목으로 분주했을 대화면 일대는 이제 울창한 숲과 유려한 하천이 어우러진 고요한 산촌의 정취를 다붓하게 내어준다.
평창강의 지류인 대화천을 가로지르는 광천교를 건너면, 금당계곡 하류의 맑은 물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수려한 비경을 자랑하는 개수리에 닿는다. 대화천 변, 개수산 동쪽 기슭의 가파른 절벽 아래 묵묵히 입을 벌린 동굴 하나. 고생대 정선 석회암층이 빚어낸 지질학적 걸작, 광천선굴(廣川仙窟) 이다.
넓은 냇물이 흐르고 신선이 머물며 수양했다는 전설을 품은 광천선굴은 지질연대가 약 4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동굴 내부가 넓고 평탄하여 접근이 쉬운 탓에 동굴은 많은 훼손을 겪었고, 보호와 정비를 거쳐 지난 2022년 '광천선굴 어드벤처 테마파크'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청량한 자연을 유아차나 휠체어를 탄 이들도 불편함 없이 탐험할 수 있도록 전 구간에 걸쳐 무장애 덱 길이 조성돼, 사시사철 누구나 편안하게 지구의 웅장한 내부를 거닐 게 됐다.

어둠과 묵직한 색채가 빚어낸 지하 갤러리
동굴 입구에 다가설수록 공기의 결이 확연히 달라진다. 사계절 내내 12~14도를 유지하는 동굴은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는 짜릿한 서늘함을,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에는 제법 포근한 온기를 건넨다.
동굴 입성. 바깥의 빛이 서서히 스러지고, 4억 년 전 축조된 장엄한 지하 무대의 막이 오른다. 약 850m에 이르는 탐방로를 따라 은은한 조명을 길잡이 삼아 걷다 보면, 천장과 벽면을 장식한 경이로운 동굴 생성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억겁의 시간이 빚어낸 종유관과 유석, 바닥에서 묵묵히 솟아오른 석순과 석주, 우아한 커튼 형태의 지형부터 바닥에 구슬처럼 맺힌 동굴진주까지 자연이 직조한 다채로운 생성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광천선굴을 특별하게 만드는 미학은 색채에 있다. 으레 석회동굴 하면 떠오르는 밝고 화려한 상앗빛의 동굴생성물 대신, 이곳의 지형은 암회색과 검은색 등 묵직하고 어두운 톤을 띤다. 조명 아래 음영을 짙게 드리운 암벽은 지하 세계 특유의 신비감과 압도적인 분위기를 한층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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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조각한 시간, 그 속에 숨 쉬는 생태계
동굴 깊숙이 스며들수록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물소리가 또렷해진다. 쉼 없이 맺히는 천장의 물방울과 일 년 내내 동굴 하층부를 흐르는 맑은 지하수는 오랜 시간 동굴을 조각해 왔다. 천장과 벽면이 오랜 세월 물에 녹고 깎이며 불규칙하게 패인 자국들을 ‘동굴 미지형(微地形)’이라 부르는데, 광천선굴은 이 지형이 유독 기묘하고 아름답게 발달한 곳으로 꼽힌다. 주굴 벽면을 깊게 파고든 거대한 요철은 과거 이곳에도 얼마나 맹렬한 물길이 흘렀는지를 증명하는 생생한 지질학적 기록이다.


'찍찍~'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명의 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조명이 닿지 않는 깊은 심연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붉은박쥐와 2급 토끼박쥐를 비롯해 7종의 박쥐가 서식한다. 아시아동굴옆새우, 등줄굴노래기 등 75종에 달하는 희귀한 동굴 생물들이 이 고요한 어둠에 기대어 생태계를 이어가고 있다.
안내 동선을 따라 30여 분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덧 멀리서 스며드는 바깥의 빛과 함께 다시 원점인 입구에 닿는다. 동굴 밖을 나서며 마주한 대화면의 따뜻한 공기와 눈부신 초록의 산세는 조금 전 지나온 4억 년의 지질사와 겹치며 낯설고도 경이로운 감동을 안긴다.
지구의 숨결이 켜켜이 쌓인 광천선굴.
평창의 깊은 산자락, 그 서늘한 자연의 품속에서 지금도 유유히 흐르는 4억 년의 신비를 마주하며 걸어보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