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과 묵향이 머무는 길 '인제'
by 강원 소셜 크리에이터
산자락을 따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강원도 인제를 찾았다.
단풍이 물든 길을 지나 마주한 이곳의 공기는 복잡한 도시와 달리 무척 맑고 상쾌했다. 깊은 산과 숲이 둘러싼 자연 속에서 글과 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온 길이었다. 따뜻한 시의 문장과 그윽한 먹의 향을 만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한국시집박물관과 여초서예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떠나온 여행인 만큼 서두르지 않고, 마음에 여유를 채우며 차분하게 그 공간들을 걸어보기로 했다.
![]() | ![]() |
먼저 닿은 곳은 한국 현대시의 숨결을 품고 있는 한국시집박물관이다. 통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지는 가을 아침 햇살을 받으며 1층 로비로 들어서자, 벽면을 따라 정갈하게 꽂힌 시집들과 고운 시구들이 가장 먼저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그 따스한 공간 한편에는 소중한 이에게 시 엽서를 띄울 수 있는 '느린 우체통'이 다정하게 서 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 한 구절을 곱씹는 느림의 미학이 그 작은 우체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 | ![]() |
계단을 올라 2층 전시실로 들어서자, 한국 근현대 시의 백 년 역사가 한 편의 입체적인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1900년대 초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신체시부터 암흑 같은 일제강점기를 견뎌낸 저항시, 그리고 광복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시인들의 생애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고뇌와 열정이 고스란히 밴 시인들의 빛바랜 육필 원고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시대를 관통한 문장의 힘이 가슴을 울렸다. 여기에 감각적인 멀티미디어 공간이 더해져, 과거의 시어들이 오늘날의 숨결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특별한 감각을 선물해 주었다.
![]() | ![]() |
가슴속에 시의 긴 여운을 품고 발길을 옮긴 곳은 이웃해 있는 여초서예관이었다. 건물 외벽에 단정하면서도 힘찬 필치로 새겨진 글씨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모든 서체에 두루 통달하여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서단에서도 추앙받았던 근현대 서예의 거목, 여초(如初) 김응현 선생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굳건하고 기품 있는 먹의 결을 닮아 있었다.
![]() | ![]() |
서예관 1층 '여초생애관'에서는 대대로 이어진 명필 가문의 선비정신 속에서 평생을 서도(書道)에 바친 선생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었다. 전시실 안에는 평생 글씨를 쓰며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붓과 벼루, 작아진 글씨를 들여다보던 돋보기와 손때 묻은 수첩 등 소박하고 정갈한 유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간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생전의 육성 강의를 듣고 있노라니, 붓 한 자루에 온 생을 싣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진했던 한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이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겼다.
![]() | ![]() |
2층 '여초작품관'으로 올라서자, 국내 최초의 서예 연구기관인 동방연서회를 이끌며 완성한 여초 선생의 거대한 묵향의 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경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서예 명작들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힘차면서도 유려하게 뻗어나간 필선, 그리고 백자 도자기에 오롯이 새겨진 글씨들은 도자기의 순백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붓끝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에 머문 먹의 농담(濃淡) 속에서, 글씨를 넘어 도(道)의 경지에 이른 거장의 굳은 기개를 실감할 수 있었다.
![]() | ![]() |
시인이 고심 끝에 건져 올린 정제된 언어와, 서예가가 온 생을 바쳐 벼루에 갈아낸 묵직한 먹빛이 함께 머무는 곳, 인제. 종이 위에 쓰인 글과 먹의 결을 따라 걸었던 하루는 복잡했던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게 해 준 시간이었다. 조용히 걸었기에 마음에 더 깊이 와닿았던 시구들, 붓끝에서 번져 나와 전시실을 가득 채우던 그윽한 묵향. 가을이 깊어가는 날, 내면의 고요와 문학의 향기를 느끼고 싶다면 인제의 한국시집박물관과 여초서예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