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초당두부, 콩이 바다를 만나다
초당두부는 여러 차례 취재를 하였었다.
서울문화의 집 답사 팀을 이끌고 간 적도 있다. 일이 없다 하여도 강원도 여행길에는 으레 초당동에 들러 두부를 먹었다.
콩과 바다가 만나 내는 그 기묘한 맛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미각을 유혹한다.
조선 사대부와 두부
초당은 경포 호 옆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부친 허엽이 한때 이 마을에 살았으며 허엽의 호 초당에서 따온 마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허엽이 살았던 집이라는 조선시대의 고가도 이 동네에 있다. 이 때문에 초당두부의 기원을 허엽에 두는 이야기가 있다. 허엽이 이 마을에서 처음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고,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가 두부 만드는 ‘잡일’을 하였을 것이라는 발상은 무리이다. 초당동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두부를 쑤어 시장에 내다파는 집이 한두 집 생겼는데, 전쟁 후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정 경제를 이끌기 위해 아녀자들이 밤새 두부를 만들어 대야에 이고 강릉 시내에 나가 팔았던 것이 차츰 이름을 얻어 지금의 유명세를 갖게 되었고, 이게 초당두부의 바른 역사이다.
끓인 콩 물을 굳히는 것들의 전통
두부는 물에 불린 콩을 갈아 콩물을 얻고, 이를 끓여서 굳히는 음식이다.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그 제조법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끓인 콩 물은 마그네슘 또는 칼슘에 반응시켜 두부로 굳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즘의 두부 제조 공장에서는 순도 높은 마그네슘 또는 칼슘의 응고제를 쓰고 있지만 옛날에는 자연물에서 이를 얻었을 것인데, 바닷물과 황산칼슘을 썼을 것이다.
천일염을 오래 두면 그 아래로 약간 탁한 액체가 빠진다. 이를 간수라 한다. 여기에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이 들어 있어 한때는 이 간수를 이용한 두부 제조법이 흔하였다. 간수 응고법을 오랜 전통의 두부 제조법으로 말하고 있으나 천일염 제조법이 일제 강점기에 전래된 것을 감안하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자연물의 황산칼슘은 광산에서 얻어지는 것이어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귀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바닷물을 이용한 두부 제조법이 조선시대 때까지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닷물 그 자체로는 응고력이 떨어지고 운송과 보관에도 힘이 들므로 바닷물을 농축한 함수를 썼을 것이다. 지금도 염전에서 소금으로 굳히기 전 농축된 바닷물, 즉 함수를 퍼 다가 두부 응고제로 쓰기는 하는데, 이 함수를 생 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당에서는 바닷물로 두부를 굳힌다.
초당두부는 바닷물 그대로를 응고제로 쓴다는 것이 특징이다. 동해의 바닷물, 좁혀서는 강릉 초당의 바닷물은 농축 없이도 콩 물을 두부로 굳힐 수 있을 정도로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다는 의미이다.
지구의 바닷물은 다 짜지만 그 구성물에는 차이가 있다. 큰 강을 대고 있는 바다나 빙하 근처의 바다는 염도 낮고, 적도 근방의 바다는 물의 증발로 인해 염도가 높다. 우리의 바다도 이 차이를 내는데, 서해와 남해의 바닷물보다 동해의 바닷물이 염도가 높고, 따라서 마그네슘과 칼슘 등의 비중도 높다. 그래서 농축 없이 바닷물 그 자체로 두부가 응고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초당동의 두부 전문 식당들이 쓰는 바닷물은 이를 전문으로 공급하는 회사의 것이다. 바닷가에 파이프를 박아 끌어올리는 바닷물이라고 하는데, 일정의 염도를 맞추어 공급한다고 한다. 초당두부를 대량으로 내는 공장에서도 역시 바닷물을 응고제로 쓰는데 그 염도 등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였다.
넉넉지 못한 마을에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
초당동 중에서도 두부집이 몰려 있는 쪽은 논밭이 넓지 않다. 바다와 다소 떨어져 있어 어촌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예전부터 넉넉한 동네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마을에서는 인력으로 부가가치를 올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외지에서 콩을 사와 두부를 만들어 또 외지에 내다파는 일을 한 것이다.
1951년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토박이에 의하면 그때는 두어 집이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두부 집이 급격히 늘었는데, 1954년에 90여 가구가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1983년에는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57명이 모여 초당두부협동조합이 만들어졌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주식회사 강릉 초당 두부’로 바뀌었다. 초당동에 공장이 있으며, 슈퍼 등에 초당두부로 팔리고 있는 두부는 이 공장의 것이다.
초당부두는 아침에 맛있다
현재 초당동에는 두부 집이 20여 곳에 이른다. 두부를 만들어 내다파는 집은 이제 없으며 모두 식당으로 운영된다. 1970년대에 처음 생긴 변화이다. 원조라 간판을 단 곳이 많지만 초당두부가 유명해지면서 외지인이 들어와 차린 몇 곳 빼고는 다들 토박이들이며 따라서 그 식당들의 역사는 고만고만하다.
제조법은, 바닷물로 응고한다는 점에서는 같고 집집이 콩 물을 내며 끓이는 방식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음식을 내는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흰 순두부만을 고집하는 데도 있고 양념을 더한 전골을 주력으로 하는 데도 있다.
초당두부의 제 맛을 보려면 아침에 가는 것이 좋다. 새벽 4시쯤 콩을 갈기 시작하면 아침 7시쯤이면 두부가 완성된다. 두부는 막 만들었을 때 가장 맛있다. 초당두부는 고소한 콩 향 뒤에 간간한 바다의 향이 묻어난다. 특히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부드러움은 공장 두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다.
취재기/ 새벽의 초당두부
밤새 차를 몰아 동해안 그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물론 순두부 취재를 위한 일이었다. 어디 개 짓는 소리도 없었다. 미리 전화를 하였으나 그 시간에 문을 두들기는 나로 인해 아주머니는 많이 놀랐다. 미안함에, 안심하시라는 뜻으로, 부엌에 서서 일하는 아주머니 뒤통수에다 괜한 질문을 날리었고, 아주머니는 건성건성 대답하였다. 만사 피곤하다. 꼭두새벽에는 혀도 꼬이게 되어 있다.
“낮엔 더우니까 새벽이 낫겠다.” 한참 지나 뭉툭한 말이 돌아왔다. “겨울에도 새벽에 해.”
콩 물을 가마솥에 부었다. 가마솥 바닥에 끓고 있는 물과 만나자 날 콩 비린내가 훅 올랐다. 콩 물은 더디게 끓었다. 30분 정도 되어서야 콩 물이 열에 의해 아래의 것이 위로 올라와 위의 것을 아래로 내렸다. 콩이 본디 지니고 있던 비린내는 점점 흐릿하여졌고 고소함은 점점 강도를 올리었다. 아주머니가 국자로 끓고 있는 콩 물을 한 대접 퍼다 내게 주었다. “배고프지.” 코는 고소하고 입은 달았다. 비린내는 옅었다.
불을 끄고 잠시 콩 물의 숨을 죽였다가 간수를 더하였다. 이내 콩 물 안에 있던 콩의 것들이 순두부로 엉기고 물은 밀어내었다. 콩 물은 점점 맑아질 것인데, 콩 물이기도 하고 순두부이기도 한 상태의 것을 대접에다 한 국자 담았다.
가까스로 비린내는 버티었고 달고 고소하였다. 콩으로 있다가 콩 물이 되었다가 이제 순두부로 변하는 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콩의 본디 성질 중에 하나 남은 것은 비린내이다. 이 비린내는 순두부로 다 굳어지고 상에 오를 때이면 아주 멀 것이다. 간장양념이 더해지면 이게 콩에서 온 것인지 아예 생각도 않으면서 먹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자연이다. 요리란 이 자연에 인간의 것을 가하여 변형시키는 일이다. 이 변형의 기술 중 한 극단이 두부이다. 그 비리고 딱딱한 콩에서 그 부드럽고 고소한 두부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매번 보아도 신비롭다.
그럼에도 나는 두부에서 콩의 본질 하나는 남겨야 더 두부답다고 생각한다. 형태와 조직 감은 다 없어져도 날 콩일 때에 지녔던 비린내 하나 정도는 두부에 조금 남겨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날 콩의 비린내를 싫어한다. 그 비린내의 두부는 새벽 순두부 집 부엌이 아니고서는 맛보기가 어렵다.
이른 아침의 갓 쑨 순두부에는 그럼에도 아주 아주 흐린 비린내가 있다. 밤새 노동으로 지친 시급제 노동자와 새벽 골프를 마친 재벌3세가 동해안의 순두부 집 옆자리에 앉아 이 비린내의 순두부를 먹을 수도 있다. 그들이나 나나 젖비린내 나는 조그만 알몸의 인간이었음을 그 비린내로 기억하였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