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목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
화암사 수바위 병풍 삼아 차 한 잔, 속세 번뇌 사라져
無慾의 경계, 나는 어디 있는가
깊은 산길, 금강산의 남쪽 자락을 지르 밟는 길
금강산 자락 고성 화암사
미시령 옛길을 따라 고성으로 갑니다. 고즈넉한 고갯길은 참 소박하고 맛깔스럽습니다. 높아지는 파란하늘아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불어옵니다.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덥지근하고 끈적이던 바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고성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산과 바다, 호수의 정취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죠. 그러나 이번 여정은 바다도, 호수도 아닌 숲 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고찰입니다. 금강산의 막내 절 화암사(禾岩寺)가 그 주인공입니다.
미시령 터널이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미시령 옛길은 차량들로 가득 찼었다. 고갯마루 정상의 휴게소에 서면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하지만 2006년 터널이 뚫리고 난 뒤 서서히 잊어졌다. 급할 것 없는 사찰여정, 추억을 되짚어 미시령 옛길을 오른다.
길은 한산하다 못해 적요하다. 터널이 놓이면서 쓸모를 잃고 버려지긴 했으되 굽이굽이 옛길이 보여주는 장쾌한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구절양장 옛길을 내려서면 화암사가 있다.
속초쪽 미시령터널에서 고작 4㎞쯤 떨어져 있지만 행정구역으로는 고성군이다. 열에 아홉은 모르고 지나치는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숲은 고즈넉하다. 불어오는 바람소리, 새소리가 길동무가 된다.
길에서 자주 만나는 게 ‘금강(金剛)’이란 이름이다. 금강산의 첫 봉우리인 신선봉 아래 있다고 해서 일주문에 ‘금강산문’이라 새겼다. 선방에도 ‘금강산 화암사’의 현판을 내걸었다. 대웅전 마당 끝에 팔각지붕으로 우뚝 세워둔 종루는 금강산의 가을 이름인 ‘풍악(楓嶽)’을 써서 ‘풍악제일루’를 이름으로 삼았다.
경내에 들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험한 기세의 골산(骨山)인 설악산 비탈이 동해 쪽으로 펴지기 시작하는 곳, 멀리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열려 있는 곳에 법당이 앉아 있다. 법당 입구, 돌로 된 무지개다리 아래 졸졸 흐르는 개울은 신선계곡의 꼭대기다.
설악산의 최북단 봉우리 신선봉(1,212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여기서부터 삼십리를 소와 폭포를 이루며 흘러간다.
‘금강산 팔만구천 암자의 첫째 절’이라고 적힌 안내문에 시선이 간다.
현재 바다와 접한 동부전선 이남의 산릉은 뭉뚱그려 설악산으로 부르지만, 옛날엔 이곳까지 금강산 자락에 속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치로 보아선 금강산 막내 절이란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화암사는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1,200년의 내력을 헤아린다.
한국 전쟁 때 폐허가 됐다가 불과 20년 전쯤 다시 세워졌다. 개창 시기는 신라시대지만 가람 내 대부분의 전각들이 중창을 거치는 바람에 고색창연한 맛은 덜하지만 풍취는 빼어나다. 대웅전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때 불교국가 천여 명이 수계를 받아 유명해진 곳이다. 꽃 문살과 단청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교하다.
화암사를 이야기하면서 빠지지 않는 것이 수바위다. 볏가리 모양 같다고 해서 처음엔 화암(禾岩)이라고 불렸다.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화’자가 거듭된 화재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뒤에 물 수(水)자로 바꿨다. 여하튼 그 모습이 무척 당당하다.
수바위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최고의 풍광은 절 마당에 있는 찻집 란야원이다. 문설주를 액자 삼아 바라보는 수바위 모습은 아름답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장관이다.
이 찻집에서는 꼭 맛봐야 할 메뉴가 있다. 송화밀수이다. 송화 가루에 꿀을 섞어 그 고소함이 일품이다. 향긋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수바위를 타고 들어오는 가을바람을 맞는다.
◇여행메모
△가는 길=서울양양고속도로를 이용해 동홍천IC를 나온다. 46번 국도를 타고 인제읍을 지난다. 미시령 터널 요금소에서 4km.
△볼거리= 수바위를 지나 신선봉에 오르는 산행길이 좋다. 신선봉에 서면 푸른 동해가 발아래 보이고 맑은 날씨에는 향로봉 너머 금강산 연봉까지 볼 수 있다. 주변에 울산바위 등 명소가 있어 가을 정취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통일전망대는 북한의 해금강과 금강산을 조망할 수 있다. 또 남쪽 최북단 항구인 대진항을 비롯해 거진항, 일출이 아름다운 청간정, 화진포, 송지호, 북방식 ㄱ자형 겹집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전통마을인 왕곡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