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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
Tour
강릉 오죽헌
조은노, 강원도청 대변인실
사진 이제욱, 본지 객원 작가

봄마다 마른 땅을 뚫고 올라
이태만 넘기면 청대에 먹물을 들인 듯
쪽동백나무 줄기보다 더 새까매져
몇 겹의 옻칠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
어른 손가락 굵기 만한 검은 대나무 



참판 댁은 주위에 어른 손가락 굵기 만한 검은 대나무 숲이 담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봄마다 마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대나무 줄기가 첫해엔 댓잎과 똑같은 초록색을 띠다가 이태만 넘기면 먹물을 들인 듯 쪽동백나무 줄기보다 더 새까매졌다



껍질도 청대에 일부러 먹물을 들이고 몇 겹의 옻칠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했다푸른 왕대보다 가늘어도 마디는 더 야무지고 옹골져 보였다



댓잎사귀에 와 닿는 바람소리도 왕대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달랐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더 이상 소란스럽지 않게 타이르며 반사시키듯 받아들였고

서쪽 큰 영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그곳의 소식을 전해들은 때처럼 부드럽게 나무가 오히려 바람을 어루만지듯 받아들였다.’ 



오죽헌을 소개하는 화두를 고민하던 중에 딱 맞는 문구를 찾았다.
이순원 작가가 말하는 정본소설 사임당 본문에 새겨진 오죽헌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겨울이 한창이던 지난 1사임당 빛의 일기가 막 시작될 즈음 오죽헌을 찾았는데 별다를 거 없는 주말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이라는 안내문에 “입고 올 걸 그랬다!”는 아쉬운 탄식을 들으며 경내에 발을 들였다마침 문화유산 해설사 시간과 겹쳐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조선 중기 중종 때 지어진 목조건물로 보물 제165호라는 烏竹軒


오죽헌에는 600년 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사임당의 친정 집으로 민간 주택이었던 오죽헌과 배롱나무 그리고 매화나무.

 “껍질이 없어 때 묻지 않은 배롱나무는 청렴과 결백한 선비를 뜻해서 아무 데나 심지 않았고 조선 시대에 궁궐왕릉사당에 주로 심었는데 

우리나라 배롱나무 중 이것이 수령이 가장 오래됐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또 꽃은 백 일 동안 피어 백일홍이라고 부른단다조선 시대에는 이 꽃이 처음 한 송이 피었을 때 모내기를 시작해서 마지막 꽃이 질 때 추수를 다 마쳤다는 첨언도 이어졌다


백일홍이 그런 거였나?’ 


오죽헌에 이렇게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나?’ 


수학여행지로 남아있는 기억을 뒤져보아도 이런 재미난 이야기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관광객들에게는 다른 가보다다들 진지하게 열심히 듣는다아이들도 신기한지 배롱나무 주변을 맴돈다.  


涵무池 象孔石 普厥施(함무지 상공석 보궐시)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용귀동 운발묵 문재자)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풂이여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어제어필

율곡 이이 선생이 어려서 쓰던 벼루에 정조 대왕이 글씨를 새겼으니 후대 사람들이 어제각에 고이 모셨다

사람은 죽고 없지만 명성과 학문이 남아있다는 이 말역사가 중요한 이유일까정조는 무슨 생각에서 저런 말들을 남겼던 걸까?’ 

그 만큼이나 율곡의 학문이 후대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것일 터이다.


몽룡실과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도기념관에 전시된 사임당의 유품과 큰딸 매창과 아들 옥산과 이우 일가의 생전 작품들도 마음을 움직인다

기념 상품들마저도 가풍을 담아 오롯이 빛난다


여자들은 이름마저 갖지 못했던 시대에 태어나 학문을 닦아 일가를 이뤄내었으니 행복했을까불행했을까알 수야 없는 일이다

다만 고단함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자 천재였으니 현세에 이르러 화폐에까지 새겨질 수 있었던 이유임에는 분명함이다



TIP: 오죽헌ㆍ시립박물관(ojukheon.gangneung.go.kr,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033-660-3311, 640-5132)
주변에 유명 공방들이 즐비해서 이곳들만 돌아봐도 한나절은 금방 지나갈 듯하다담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한옥마을
(http://www.ojuk.or.kr, 033-655-1117)도 하루쯤 머무르기에 좋다창호지에 너울거리는 달빛
의 정취도 꽤나 근사하고 집에 곱게 모셔 놓은 한복을 꺼내 하루쯤 입고 지내도 좋겠다
.


 

한편 강원도는 지난 1975년부터 사임당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신사임당상을 수여해왔으며 올해도 지난 220일부터 오는 321일까지 후보자를 공모중(033-249-2522)이다.  





소설가 이순원이 바라본 대를 앞서간 천재 예술가 사임당 



편집자 최근 ‘정본 소설 사임당을 출간한 이순원 소설가를 통해 師任堂을 조명해 봅니다

이 작가는 강릉 출신으로  ’은비령’,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그대 정동진에 가면의 저자로 저명한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성 가운데 신사임당처럼 태어나고 죽은 날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인물도 드물다

사임당은 1504 10 29일 강릉 북평촌(오늘날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1551 5 17 47세를 일기로 서울 삼청동에서 세상을 떠났다우리 나이로는 48세다.


사임당뿐 아니라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도 태어난 날과 죽은 날중간 중간 행적이 외손자인 율곡이 쓴 묘비명과 행장(일대기말고도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여자의 삶에 모녀가 함께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은 모녀가 함께 학문을 하였다는 것이고그리고 그 집안이 전통적으로 딸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오죽이라고 불리는 검은 대숲에 둘러싸여 있는 이 집을 처음 지은 사람은 사임당의 외고조부 최치운이었다

그는 세종임금 때 집현전 학사를 거쳐 이조 참판과 세자(문종)의 학문을 가르치는 우빈객을 지냈다

그는 학문으로만 이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그는 고향의 경포 호수를 사랑해 자신의 호까지 호수 이름과 똑같이 ‘경호라고 짓고 고향에 오죽헌을 지은 다음 

나중에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이곳에 와 살려고 했다그러나 그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둘째 아들 최응현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그때 최응현의 나이 고작 13세였다그도 아버지처럼 일찍 벼슬길에 나서 성종과 연산군 시절 대사헌과 공조·병조·형조참판을 지낸 다음 

75세가 되어 이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다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들 가운데 둘째 딸과 사위 이사온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장인 최응현으로부터 이 집을 물려받은 이사온도 외동딸(용인 이씨)만 두어 나중에 이 집을 자신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아버지)에게 물려주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4대에 걸친 오죽헌의 주인들 모두 당시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딸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이 사임당의 삶이 같은 시대 다른 여성들의 삶과 다른 점인지 모른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 임금조차 여자는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던 시대에 4대에 걸친 오죽헌의 주인들은 

아들과 차별 없이 딸들에게도 학문과 시와 서화를 가르쳤다. 

특히나 사임당은 당시 과거시험을 보는 선비들 중에서도 학문이 높은 자들만 입문하여 공부하는 오서육경 외에도 중국의 여러 문학서와 역사서를 두루 공부하고

 따로 서화의 세계를 익혔다.


 

사임당은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서당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한창 서당에 다닐 나이에 서당이 있을 턱이 없는 평창의 작은 마을에 살기도 했다

스스로 자식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일찍이그리고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런 여성은   사람도 없었다

율곡도 학문에서 자기의 스승은 어머니뿐이라고 말했다큰딸 매창은 어머니를 닮은 모습 그대로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고

율곡에겐 학문에 정진하게 하였으며막내아들 이우는 후일 ·서화·(거문고) 사절로 불릴 만큼 자식들마다 저마다의 소질을 이끌어내었다.


애초에 사임당은 자신의 시대에는 여성 예술가로 평가되었다

특히나 산수도에서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인 안 견 다음가는 화가로 평가 받았다

율곡의 어머니로 그렇게 평가 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시험 소과 초시에도 오르지 못한 ‘선비 이난수(이원수)의 처로 그런 평가를 받았다

『양곡집』을 쓴 소세양과 『패관잡기』를 쓴 어숙권 등이 사임당의 산수화에 대해 누구도 그 흔적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던 것이 사임당의 죽음100년 후 이 땅의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서인 정치가들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야 산수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로서의 자리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를 낳은 오로지 현숙한 부인으로만 이미지 메이킹이 되었던 것이다

사임당이야말로 현대에 들어와 그의 예술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