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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103호
Food
황교익의 맛 이야기
VIEW.9552
황교익 강원도 홍보대사이자 유명 맛칼럼니스트
사진 이제욱 본지 객원 작가 박상운 강원도청 대변인실


 


민족마다 습관성 음료라는 게 있다. 서양 각국의 커피나 홍차, 남미의 마테, 중국과 일본의 차(이른바 녹차)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음료가 없다. (기호로 마시는 전통 차와 습관성 음료는 다르다. 습관성 음료란 끼니를 때울 때 항상 곁에 두고 마시는 음료를 말한다. 숭늉이 있다고? 글쎄다¨¨¨)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도 차나무가 잘 자라는 기후 조건을 갖투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차를 일상 음료로 많이들 마셨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 차 문화가 급격히 쇠잔해졌는데, 그 이유에 대해 '조선 정부가 숭유억불 정책을 쓰면서 불교의 한 문화인 차 문화가 쇠락했다는 설'과 '차 재배 지의 수탈이 격심하여 민중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차 재배를 기피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 금수강산 우리나라 골 골에는 맛있는 물이 샘솟는 감천(甘泉)이 흔하디흔해 굳이 차를 끓여 마셔야 할 필요를 못 느껴 차 문화. 곧 습관성 음료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설이다. 요즘에야 수질 오염으로 감히 지하수 마시기가 두렵지만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동네마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내뿜는 샘이나 우물이 하나씩 있어 마실거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굳이 차를 끓인다든가 하는 수고로움을 맡으려 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습관성 음료가 없는 우리의 다소 '격이 떨어지는' 음식문화를 변명하기 위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17년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의 습관성 음료를 꼽자면. 커피이다. 아침의 시작을 커피로 시작하고 식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앞에는 커피가 꼭 놓인다. 어느 장소를 가든 인스턴트커피를 뽑을 수 있는 자판기는 최소한 반경 50미터 이내에는 꼭 있다. 예전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한 집 건너 커피숍"이다. 목 좋은 건물의 1층은 커피숍이 다 차지하고 있다.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이라 할 만하다.



커피도시의 탄생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에 '커피 도시'가 탄생하였다. 강릉이다. 온 도시가 커피이다. 강릉 가면 커피를 꼭 마셔야 하는 문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국내에는 커피 원두가 생산되지 않는다. 강릉도 사정은 같다. (하우스에서 '관광용'으로 재배하는 커피는 여기서 제외하자.) 외국에서 재료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음료임에도 강릉의 '향토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강릉이 커피 도시가 된 것은 유명 바리스타와 대형 커피 가게가 강릉에 터를 잡은 덕이 크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니라는 것을 몇 년 전 강릉의 커피 관련 행사에 참가하여 알게 되었다. 행사장에 나온 강릉의 수많은 커피 애호가들을 뵙고 깜짝 놀랐었다. 커피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고 작은 로스터를 가지고 집에서 원두를 볶는다고 하여 처음에 나는 커피 가게 주인들인 줄 알았다. 취미가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리는 일이었다. 강릉시가 애초에 커피 도시를 기획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꾸준히 교육한 결과일 것이다. 향토음식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향토의 사람들이 먼저 그 음식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릉에서는 후미진 골목의 이름 없는 작은 카페의 커피도 수준이 상당하다. 커피에 대한 시민의 수준이 높으니 커피를 예사로이 파는 가게는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음식 수준은 소비자 수준을 반영한다.




 

바다를 마시다

강릉커피가 특별히 맛있는 것은, 강릉 사람들의 커피 수준 덕분만은 아니다. 자연이 한몫을 한다. 커피를 생산하지도 않는데 웬 자연이냐고? 커피를 마시는 자연 환경이 이야기이다.

강릉의 여러 커피 가게들은 바닷가에 있다. 바다를 보면서 마신다. 시각적으로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바다향이다. 바다의 향이 커피의 향에 더해지고, 그러니 강릉에서 마시는 커피는 특별 날 수 밖에 없다.

 바닷가에 서면 사람들은 저절로 숨을 깊이 들이킨다. 바다의 향을 더 깊이 맡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 바다 향만으로 사람들은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이건 인간의 본능이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시면 의도하지 않아도 바다의 향과 커피의 향이 뒤섞여 들어오게 되어 있다. 평소에 도시에서 마시던 커피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고, 그 순간 강릉 커피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강릉 바닷가에 있는 자판기의 커피까지 맛있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끔 강릉에 간다. 오징어도 먹고 두부도 먹고 하지만. 바닷가에 가서 커피 마시는 일은 꼭 챙긴다. 동해의 맑은 바다를 마시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