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찜해둔 장소에 멈춰 서서 영상을 보다가 내키면 빛바랜 듯,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진 ‘봉봉 방앗간’ 카페에 들려 커피를 손에 쥔다. “1940년대부터 방앗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2011년 문을 열었다”는 설명이 귀에 박혀 들어온다.
전통 냄새 물씬 풍기는 오래된 골목길에 디지털 플랫폼이 춤을 추는 느낌이다.
옛 성벽터의 흔적, 임영관(臨瀛館), 주민들이 만든 햇살 박물관, 정치 1번지였다는 청탑 다방.
파랑달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드라마틱 미디어 트래킹 명주애歌’의 참여자들인 젊은 여행객들에게 알토란같은 명주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솔직히 강릉시민들에게는 관광지도 아닌데 아기자기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곳으로 입소문을 타 이제는 제법 전국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명주거리라 불릴 정도로.
사실 명주동은 고려시대 때부터 천년 이상 강릉의 도심이었다. 경찰서, 기상청, 전화국, 한국은행, KBS방송국이 몰려 있으면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왔고 눈을 들어 보이는 거리에 국보 제51호 임영관, 칠사당, 제3문 객사문 같은 문화 유적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2001년 강릉시청 이전으로 상인들도 떠나고, 하나 둘 상점들도 문을 닫자 상권이 침체되면서 도심 공동화가 거론 될 정도로 급속히 사그라졌다. 명주동의 몰락은 중앙동, 금학동으로까지 번져갔다.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더 멀어졌다.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서 시작됐다.
강릉대도호부관아가 복원되고 1958년 세워진 강릉제일교회 건물도 리모델링해 소극장이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적산가옥(敵産家屋)은 북카페로 개조됐다. 화마로 폐허로 방치됐던 주택은 커피를 체험하고 마실 수 있는 명주 사랑채로 변신했다. 영상 예술을 하는 이들 몇몇이 뜻을 모아 문을 닫은 방앗간을 사들여 카페 ‘봉봉 방앗간’을 만들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절치부심했던 강릉시도 힘을 보탰다. 빈집 몇 채를 시가 사들여 마을 주민들을 위한 주차장을 만들었다. 텅 비어 있었던 옛 명주 초등학교 건물은 공연장과 녹음실, 개인 연습실을 갖춘 ‘명주예술마당’으로 바꿨다.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3년 강릉마을 만들기 지원센터에 사업에 참여한 주민 23명은 ‘작은 정원’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텃밭과 공터에 꽃을 심고, 골목길 곳곳에 화분을 놨다. 터주 대감이자 토박이 어르신인 이들이 ‘골목투어 해설사’가 됐다.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인식됐던 프리마켓에서 전을 지져내며 내친김에 옛날을 상징하는 물품과 사진들을 모아 ‘햇살 박물관’을 개관했다. 주민이 직접 마을을 소개하는 ‘오매불망 골목 투어‘는 대표 콘텐츠가 됐다. 2016년 강릉문화재단의 명주예술마당으로 이전은 ‘명주동 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의 기폭재가 됐다.
마침내 ‘명주 인형극제’와 ‘강릉 야행’은 강릉시민의 축제가 됐다.
한국관광공사가 도시 재생을 주제로 선정한 ‘가볼 만한 여행지’ 10곳에 포함되는 성과도 거뒀다.
어연번듯함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빛을 발했다.
전통과 현대가 교묘히 어우러진 도심에 외국인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명주거리 상점마다 내걸린 전통을 담은 웰컴등, 빨간 리본, 대호보부관아에서 열린 전통체험놀이, 도심 가운데 자리 잡은 전통 가옥들.
2018년 현재 명주동에는 빈 점포가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콘셉트의 다양한 점포들이 문을 열었다. 적산가옥은 카페 오월로, 작은 공연장 단에서는 인디밴드들의 무대로, 명주 프리마켓은 야간 프리마켓으로 변모해 밤 10시까지 운영된다. 할머니들이 관리하는 꽃 화단, ‘카페 남문동’에서 ‘명주예술마당’ 옆문과 연결되는 담장에는 화가 임만혁씨의 그림들이 그려진 갤러리 로드, 작가 윤후명 문학거리,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임당동 성당. 임영관 삼문, 화교 소학교, 경방댁, 커피 체험을 할 수 있는 열린 공간 명주사랑채.
옛날 담은 명주거리에 문화 예술 꽃이 활짝 피었다.
골목을 돌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볼거리에 걷는 재미 또한 못지않게 쏠쏠하다.
이 변화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강릉문화재단의 이종덕 사무국장의 한마디가 뇌리에 남는다. “저녁이면 저녁밥 짓는 소리, 소담한 이야기 소리, 개짓는 소리가 묘하게 악기처럼 어울립니다. 왠지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으신가요? 봄꽃 흐드러진 계절인데 함께 걸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