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닫기
2018.11-12
110호
Food
황교익의 강원의 맛 이야기 동해 미역
VIEW.9712
황교익
사진 김시동·박상운


생일날의 미역국

다섯이나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생일이었다. 소반에 ‘고봉밥’과 미역국, 떡, 갈비, 생선찜, 부침개 등등이 놓인 상을 받았다. 독상이었다. 가족들은 따로 상을 차려 밥을 먹고 오직 나만을 위한 상이 내 앞에 놓였었다.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여 마치 어제의 일인 듯하다. 나중에 그게 생일독상이란 것을 알았다. 오랜 풍습인데 생일에는 원래 그런 독상을 차려주었다 한다.



빈곤했던 우리 민족은 생일날 하루라도 혼자 넉넉하게 먹으라고 그런 풍습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딱 한 번의 생일 독상만 기억하는 것은 그 이전은 너무 어려서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 이후는 아마 간단하게 미역국 정도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내가 1962년생이니 한국이 조금씩 먹고 살만해지기 시작한 것이 딱 그맘때이고, 먹고 살만하니 ‘혼자 잘 먹는 날’ 같은 것은 필요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은, 생일이면 다들 케이크이다. 케이크를 자르고 파티를 한다. 아침에는 그래도 전래의 생일 음식을 먹는다. 미역국이다. 생일독상의 흔적인데, 미역국만 달랑 남았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하면 일신상에 큰 변고가 있는 듯이 여긴다. “생일인데 미역국도 안 먹었단 말이야” 하고 걱정한다. 미역국은 한 인간의 탄생을 기리는 음식이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전통’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이 없다. 왜 하필 미역국인지 그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을 해놓은 이도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이런저런 자료를 바탕으로 맥락을 훑는 일이다. 이런 일에 정답은 없다. 일리(一理)만 있으면 된다. “일리 있게 들리지?” 하는 그 일리이다.


 



삼신할미의 음식
한 인간의 탄생, 즉 아이의 출산 즈음부터 미역은 그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태기가 있을 때이면 장미역을 마련했다. 꺾지 않고 말려 장미역이라 하는데, 산모가 아이를 잘 낳고 태어난 아이도 오래 산다고 여겼다. 산모의 방 한 편에 상을 놓고 그 위에 장미역과 쌀을 올려두었다. 이를 삼신할미상이라 하였다. 삼신할미는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삼신할미상의 미역과 쌀로 국을 끓이고 밥을 하여 다시 상에 올리고 산모도 이 미역국과 밥을 먹었다. 산모는 이날부터 세이레(21일)까지 미역국을 먹는다. 삼신할미상은 곧 거두어지지만 아이가 웬만큼 자랄 때까지는(보통은 일곱 살 때까지는) 생일에 생일상과 함께 삼신할미상도 차렸다. 물론 그 두 상에 미역국이 올랐다. 이 모든 풍습이 거의 다 사라졌으나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일만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일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을 하는 이들도 있다. 미역이 조혈 작용을 하여 산모에게 좋은 음식이기 때문에 그런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삼신할미 상을 차려 득남을 기원하였던 옛사람들이 이 같은 과학적 지식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옛사람들이 미역의 영양적 가치를 잘 알고 이를 챙겨 먹인 것은 아니다. 미역이 조혈 작용을 돕는다 하여도 며칠씩 삼시세끼 미역국을 먹으면 요오드의 과잉으로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의학적 조언도 있다.



미역의 탄생, 인간의 탄생
미역이 인간 탄생을 기리는 음식이 된 것은 미역 생산 방법과 관련이 있다. 양식 미역이 없었던 시절, 자연산 미역이라 하여도 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였다. ‘미역바위 씻기’라는 것이 그것이다. (생일상의 미역국이 미역 생산 방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역 생산 어민들을 만나 취재를 하면서 문득 생일상의 미역국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건 순전히 ‘황교익식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독자들에게 일리 있게 들리면 기쁠 것이다.)




미역은 1년생이다. 봄에 미역 줄기 아래에 미역귀라는 주름진 덩이가 생기는데, 여기에서 유주자(遊走子: 무성 세포로 정자와 난자가 되기 전의 상태)가 방출되고 여름에 들면서 미역은 녹아버린다. 유주자는 방출 후 배우체가 되어 여름을 나고 가을이면 암수로 나뉘어져 수정을 하는데, 이 수정란이 바위에 붙어 미역으로 자란다. 자연산 미역의 수정란이 바위에 붙을 즈음인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미역바위 씻기를 한다. 미역이 붙을 바위를 청소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는 이 미역바위 씻기가 큰일이었다. 이때이면 날씨는 춥고 바다도 거칠다. 파도가 넘실대는 미끄러운 바위에 올라 이 일을 해야 한다. 또 미역바위 쟁탈전도 치열하였다. 미역바위를 씻은 사람이 그 바위에서 나는 미역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닦은 바위는 겨우내 미역을 올려 이른 봄이면 거둘 만하게 자란다. 아무것도 없는 바위에서 그 혹독한 겨울을 넘겨 미역이 탄생하는 것이다. 옛사람의 눈에 미역의 탄생과 인간의 탄생이 다르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정성과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똑같다. 삼신할미상과 산모의 밥상, 또 매년의 생일상에 미역국을 올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럴듯한가. 아니다 싶어도 그만이다.)



양식과 자연산의 차이
바다에 사는 풀을 해조라 한다. 우리말로는 바닷말이다. 바닷말을 식용하는 지역은 세계에서 그리 넓지 않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일부, 하와이 등에서 먹는다. 우리나라 바다에서는 약 500종의 바닷말이 자라며 김, 다시마, 미역, 톳, 파래, 청각 등 50여 종을 식용한다. 이 식용의 바닷말 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이 미역이다. 갈조류 다시마 과에 속한다. 미역은 우리나라의 모든 연안에서 자란다. 예전에는 바위에 붙어 자라는 미역을 채취하였으나 요즘의 미역은 양식이 많다.



1980년대 들어 바다의 양식업이 급증하였는데, 미역도 그때 크게 번졌다. 남해에서 주로 양식을 한다. 양식장에서는 바다 위에 부표를 띄우고 미역을 붙인 줄을 바다 속으로 내려 미역을 키운다. 미역을 양식한다고 하여 미역이 먹을 비료를 주거나 약을 뿌리는 일이 없으니 자연산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그 맛 차이는 있다. 양식은 자연산보다 미역 거두는 시기가 조금 빠르다. 바닷말도 햇볕을 받아야 잘 자라는데 양식장의 미역들이 그 적절한 깊이에 있어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식 미역은 대체로 부드럽고 자연산은 단단하다.



東海 미역은 다르다
미역은 한 종밖에 없다.
어느 지역의 미역이든 같은 종인 것이다. 그런데 남해와 동해의 것이 조금 다르다. 동해 것은 길이가 길며 잎도 넓다. 특히 미역귀와 잎 사이의 줄기가 길다. 이 동해의 미역을 두고 북방 형이라 한다. 북방 형 미역은 남방 형에 비해 탄력이 있다. 미역국을 끓이면 풀처럼 풀어지는 일이 없다. 그래서 미역국용의 마른 미역은 북방 형의 미역이 좋다.
동해에는 바다 한복판에 부표를 띄워 키우기 양식장이 없다. 그렇다고 자연에만 맡겨 미역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매년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미역바위를 씻는다. 이 일이 고대다. 이듬해 봄이면 미역을 거둔다. 3~4월에 작업을 한다. 해녀가 나서 깊은 바다의 미역을 거두어오기도 한다. 이 맛난 동해 미역을 싸게 구하려면 바닷가의 작은 동네로 가야 한다.
대규모 양식장 같은 것이 없으니 집집이 조금씩 미역을 거두어 말린다. 동네 골목에, 담벼락에, 마당에서 봄 햇살을 받으며 바다 향을 더하는 미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해안 봄나들이 나갔다 미역 한 뭇 (미역 열 장을 이리 부른다) 사서 친인척과 이웃 선물로 돌리는 재미는 안 해보면 모른다. 친인척과 이웃의 평가에 의하면, 동해 자연산 미역은 단단하고 향이 짙어 미역냉국으로 그만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