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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6
113호
Food
황교익의 강원도 맛 이야기, 화천 어죽
VIEW.9896
황교익 강원도 명예도민이자 홍보대사, 유명 맛 칼럼니스트
사진 박상운 강원도청 대변인실

어죽은 산골 농민의 끼니

 
   


서양인에게 고기와 채소를 주면, 고기는 굽고 채소는 그 옆에 곁들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에게 고기와 채소를 주면, 물을 넉넉히 붓는 탕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습관이다. 이런 음식 습관을 우리는 전통 혹은 문화라고 부른다. 다시 풀면, 한국인은 탕을 끓여 먹는 전통이 있고 그 탕을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도 고기이고, 한국인에게 물고기가 주어지면 대체로 탕으로 끓인다. 탕으로 못 끓일 물고기는 없다. 바닷물고기로는 심지어 그 비릴 것 같은 갈치와 고등어로도 탕을 끓인다. 민물의 물고기로도 그 어떤 것이든 탕으로 끓일 수 있다. 비린내와 흙내를 올릴 것 같지만 이 잡내를 죽일 수 있는 비장의 양념이 비치되어 있다. 장이다. 된장과 고추장이다. 장만으로 잡내를 누를 수 있다. 이도 모자라면 마늘이 있고 풋고추가 있고 깻잎이 있고 부추가 있고 쑥갓이 있고 초피가 있고, 등등이 주변에 있다.

조선의 어업 사정은 형편이 없었다. 상업을 천시하고 화폐경제를 발달시키지 못하여 대량으로 물고기를 잡아 유통시킬 시장이 없었다. 소, 돼지, 닭도 넉넉하게 키우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고기를 아예 못 먹은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계곡이 많고, 그 계곡을 따라 작은 하천들이 실핏줄처럼 펴져 있으며, 그 하천에서 물고기를 얻었다. 계곡물에 물고기가 얼마나 많다고 그러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인데, 옛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산업화로 그 많던 물고기를 잃었다.

한반도의 하천에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예를 들겠다. 서울 한복판에 청계천이 흐른다. 이제는 복원이 되어 (어항 속의 물 같지만 어떻든) 물이 흐르는데, 한때는 이 하천이 도로 아래에 있었다. 도심의 더러운 하수관 같은 이미지가 청계천이라는 이름에 아직도 조금은 붙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 청계천에서 직업적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꼭지라 불리던 거지들이다. 이들이 구걸과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조선 정부가 청계천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도록 유도하였다. 주로 잡는 게 미꾸라지였다. 조선에서 가장 번창하였던 한양 한복판에 있는 개천이 그 정도였다.





계곡물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에는 그물도 필요 없다. 족대나 통발만 있으면 된다. 한두 시간이면 탕을 끓일 수 있는 양이 잡힌다. 이렇게 잡으면 물고기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모래무지 중고기 갈겨니 쉬리 동자개 버들치 납자루 열목어 등등이 구별 없이 잡힌다. 단점은 몸집이 작다는 것이다. 또 하나 단점은 뼈가 억세다는 것이다. 해결 방법이 있다. 내장을 빼고(쓸개 때문에 쓴맛이 나므로 이 작업을 해야 한다) 통째로 푹 끓인다. 살이 흐물흐물해지면 채에다 밭아서 뼈를 걸러낸다. 그러면 살코기와 국물만 남는다. 여기에 장을 풀고 탕으로 끓이면 된다. 이를 어탕이라 한다. 여러 물고기가 들었고 그 이름을 일일이 붙여 말할 수가 없으니 잡어 탕이라고도 한다.

이만으로는 충분한 한 끼가 되지 못한다. 탄수화물이 들어가 주어야 한다. 쌀을 더하면 된다. 밥을 해서 넣어도 되고 불린 쌀부터 해도 된다. 어탕과 함께 푹 끓여서 내니 죽 같다. 어죽이다. 어죽이라고만 하면 원래의 탕 조리법이 안 산다. 어탕죽, 어죽 탕이라 부른다. 어죽 탕이 강세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으로부터 밀가루를 넉넉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수제비를 빚어서 넣거나 소면을 더하는 어죽이 생겼다. 밥과 수제비, 소면 세 종류가 다 들어간 어죽도 흔히 볼 수 있다.




사라진 복날 천렵
겨울에도 계곡에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계곡물에 들어가려면 여름이 좋다. 한 사람이 족대를 들고 두어 사람이 물고기를 쫓다 보면 물놀이가 따로 없다. 특히 복날에 맞추어 물놀이 겸해서 어죽을 끓여 먹었다.

복날에 들면 논일이 한가하다. 모내기 이후 논 잡초도 제거하였고, 이제부터 벼가 자라는 것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이른 봄부터 논 갈고 모 내고 물 대고 잡초 뽑고 하느라 몸이 지쳐 있을 때이다. 쉬어야 한다. 넉넉하기만 하면 닭이나 개를 잡겠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한 농민들도 많았다. 특히나 강원도나 충북, 경북 등, 산간지의 농민들은 복달임할 짐승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복날의 여유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장정 서넛이 커다란 가마솥을 들고 계곡으로 간다. 마을을 돌며 개똥이네 소똥이네 다 모이라고 한다. 장 맛있는 개똥이네 장독대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내놓는다. 넉넉한 텃밭을 가지고 있는 소똥이네에서 풋고추며 깻잎 쑥갓 등등을 거둔다. 마늘은 누구네, 쌀은 누구네 하고 추렴을 한다. 지주 정도 되면 참가는 못 해도 술은 내어야 한다.




계곡물에서 한바탕 물놀이 겸 물고기 잡이를 하고 가마솥에다 어죽을 끓인다. 이건 남자들의 일이다. 물고기 잡이도 일종의 사냥이다. 그래서 천렵(川獵)이라 한다. 천렵뿐만 아니라 그 어떤 복달임이든 남자가 준비를 한다. 이를 나눌 때에도 남자들이 한다. 여자들은 놀면서 먹으면 된다. 복날 전통이다.

복날 어죽 전통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계곡에 물고기가 없고, 농촌에 가마솥 옮길 젊은이가 없다. 어죽은 이제 식당에서 먹을 뿐이다. 그나마 계곡이 있는 산간지의 식당에 가야 한다. 계곡물이 맑아 물고기가 아직도 넉넉하게 헤엄쳐 사는 동네에 가면, 특히 여름에 가면, 어죽은 먹어야 한다. 먹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여야 한다. “여기 잡어들은 어떤 물고기인가요.” 그 맛을 분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모래무지니 갈겨니니 쉬리니 하는, 평소에는 입에 올리지 않는 우리 민물고기를 호명하여 그 맑은 계곡물의 안녕을 잠시 생각하기 위함이다.
 


촬영협조
화천어죽탕 033-442-5544. 화천군 간동면 파로호로 91


*TIP : 파로호 가는 길목의 '화천어죽탕' 식당은 북한강과 파로호에서 나는 제철 잡고기를 푹 삶아 뼈를 추려낸 다음 추어탕처럼 끓인다. 진한 어죽탕이 담백하고 깊은 맛을 풍겨 지역 주민들이 향토음식으로 추천하는 집이다. 오래된 식당에 주인이 모아 놓은 산림들이 차곡이 쌓여 볼거리를 제공하는 식당이다. 화천어죽탕은 2014년 블루리본 서베이의 리본을 받기도 했다. 블루리본 서베이는 독자 2만 명과 전문가의 평가를 바탕으로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맛집을 지역별로 소개하는 책이며 매년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 편집자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