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복령 주막 촌의 열일곱 집의 같은 차림표
정선 갓 메밀전병과 갓김치
“이십여 남짓한 식당들이 모여 있는 데 모두 정선 토종 갓을 주재료로 만드는 음식을 파는 것 아세요? 주말이면 줄 서야 해요”
깜짝 놀랐다.
물론 금시초문이기도 했지만 정선군 농업기술센터 여진희 씨로부터 음식 장사가 시작된 지 이미 27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예? 정말요? 그런 곳이 있다고요? 왜 몰랐지? 처음 들었어요!” 라며 자못 흥분했었다.
해발 780고지.
백복령 주막. 42번 국도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정선과 동해를 잇는 딱 경계선 위치에 있다. 여기를 통과해 차로 10분 이내에 동해와 삼척, 강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지난 10월 말 즈음 아직 갓을 수확하지 않은 농장주를 어렵게 섭외하고 푸드 전문 사진작가와 일정을 조율하고 길을 나섰다.
예로부터 동해와 삼척 사람들이 영서 지방과 한양을 왕래하기 위해 넘던 중요한 길목. 지금이야 자동차로 휘리릭 넘어가면 되지만 예전에 고개를 넘으려면 영을 넘는 산맥의 세찬 바람을 이겨야 했고 굽이굽이 첩첩한 산봉우리를 지나야 했던 길.
사실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찾아보니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오 트레일 시리즈로 소개(본보 110호)된 곳이기도 했다. 당시 필진에게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던 건 그들도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터. 아마도 맛있게 먹었겠지만 일부러 묻지 않고서야 20여 남짓한 식당에 같은 차림표가 걸려 있다는 걸 뉘라서 알 수 있을까?
정선 갓이라니.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정선 갓 전병’이라 뚜렷이 새겨져 있다. 1호, 2호, 그리고 17호까지. 쉼터라는 이름을 덧붙이더니 이제는 주막 촌, 먹거리 촌으로 불리며 재미난 이름도 만들었다. 딸 부잣집, 털보 산방, 김가네, 영선이네, 금희네, 정희네, 동해 집, 카페 꽃잠까지.
주민들이 아무것도 없던 곳에 직접 터를 닦았다고 했다.
“재배한 농산물을 어떻게 하면 잘 팔아서 돈을 좀 벌어볼까 싶었던 거지요. 그러면 먹을 것도 같이 만들자 그랬다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저쪽 건너편 다섯 집이 먼저 했죠. 농산물 직판장이 주목적이었는데 하다 보니까 입 소문이 자꾸 난 거죠. 지금은 토속 음식점으로 다들 알고 찾아오니까요.”
22년 차 2호 집의 주인장인 최종길 대표의 설명이다.
수십 년이 넘도록 백복령을 지켜온 이들. 사연도 제 각각이다.
쉼터 3호 이정남 씨는 이 식당으로 자식들을 모두 건사했다. 개업 초기 찾아왔던 동해 해군 부대의 가족들이 가장 오래된 고객이 되었단다. 정년으로 퇴직하고 새 식구들과 함께 일 년에 서너 번은 다녀가는 백년손님이 되었다. 1호 집의 권해숙 대표는 친정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았다. 4호 집의 전수희 씨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이제 17년 차. 제법 돈 버는 재미에 쉴 틈이 없는 여름도 기껍게 보낸다.
2호 집의 유영선 씨네는 지금은 줄였지만 한때 2.3ha(7천여 평) 규모로 정선 갓을 심었다. 이 갓들로 일 년 내내 음식 장사를 했다. 김영순 대표가 운영하는 11호 집은 맛깔스럽게 차려내는 음식으로 백복령의 음식을 기록한 사진 촬영의 단골 식당이 되었다.
예전에는 피나무 통에 정선 갓과 소금을 켜켜이 넣고 밟아 다져 저장해 집집마다 자녀들을 동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은 소금에 절여 독에 담아 무거운 돌로 빈틈없이 눌러 저장한다. 이렇게 담근 정선 갓김치는 다음 해 김치를 다시 담글 때까지 다양하게 활용된다.
운이 좋아 10월부터 김장철이 끝날 때까지 고객들은 마치 겉절이 같은 갓김치를 밑반찬으로 맛볼 수 있다. 콧등 치기나 메밀국수, 칡 국수, 비빔국수의 고명으로 얹는다. 양념하면 양념김치, 물만 부으면 물김치. 메밀과 감자와도 잘 어울려 임계 주변과 정선에서는 갓김치만 있으면 집안 대소사, 손님 접대도 걱정 없었다고.
그리고 만두나 메밀전병의 소로 넣는다.
차림표에 새겨진 메밀전병 그 어디에도 없지만 갓 이야기는 없지만 갓김치를 다지듯 썰어 양념한 소가 반드시 넣어 만드는데 오직 이곳 식당들에게만 있는 특별함이다.
제사나 명절 때도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른단다.
번철이나 뜨거운 팬 대신 대부분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사용하는 데 기름을 바르고 국자로 반죽을 떠서 얇게 부친 다음 정선 토종 갓김치를 송송 썰어 양념하여 올리고 김밥을 말듯 굴려준다. 시대에 따라 소의 내용물도 많이 변했지만 갓김치 하나로 유일한 맛을 낸다.
아라리 영농법인조합 최금춘 대표는 “아래 지방의 갓과는 품종이 달라요. 보통 키는 무릎까지 자리고 잎은 여리고 부드럽지요. 살짝 헹구거나 데쳐서 소금과 간장에 참기름과 깨소금 송송 뿌려 묻혀 겉절이로 차려내면 맛이 그만”이라며 “일 년에 서너 번 재배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예요. 씨만 뿌리면 농약도 전혀 없어도 쑥쑥 잘 자란다”라고 했다.
“역사도 깊어요. 옛날부터 높은 산, 깊은 골이다 보니 주막 촌도 있었을 거예요. 과거를 보러 가려면 이 길목을 지나야 했다니까요. 생계와 연관되어 생기게 된 자연 발생적인 집성 촌이랄까요. 문헌 기록도 찾아냈지요”
관련 자료를 모은 ‘정선 갓 그리움의 맛 백복령 주막 이야기’와 정선 갓의 성분 분석과 기록을 찾아내 소개한 ‘정선 아리랑을 닮은 갓’의 제작 배경이다.
알고 보니 이 주막거리의 갓 전병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아 이 초록색이 갓이구나!”
반찬으로 내어주시는 갓김치가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지나간 시간과 이야기, 삶이 녹아있는 탓이겠지. 음식에는 추억이 담겨있다는 문구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정선의 갓과 음식 문화에 한껏 취했던 날이었다.